2021. 5. 19.

역사가 전환될 때에는 정치지도자의 결단이 있기 마련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할 땐 중국의 간섭에 굴하지 않고 사대주의적인 신하의 반대를 이겨내는 결단이 필요했다.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건 1893년 뉴질랜드에서였는데, 의회에서 찬성 20, 반대 18로 통과됐다고 한다. 단 1명만이라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역사의 진전은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다.

우리도 지금 역사의 전환기를 살고 있다. 70년 넘는 분단 시대를 지나고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평화 번영 통일의 새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내기 위해서는 전환을 가져올 결단이 필요하다. 역사는 지금 그런 결단을 내릴 출중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당장 표가 될 일만 하는 정치인은 흔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내지 못한다. 역사는 때로는 당장 이뤄지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더라도 시대를 전진시키는 결단을 내릴 그런 정치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 기억 속에 남은 훌륭한 정치지도자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1. 단선단정에 맞선 자주통일국가건설노선의 의미 있는 승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국민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정치지도자 중 한 명은 김구 선생이다. 김구 선생이 한 일은 많지만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장면으로 꼽히는 건 바로 1948년 방북이다.

“지금 이때 나의 단일한 염원은 3,000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요구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년 2월에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에 실린 김구 선생의 성명서


1945년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38선이 그어지고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며 분단이 되기 시작했다. 38선 이남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은 단독선거(단선)를 실시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단정)를 수립하려 했다. 미군정은 단독선거를 강행하기 위해 1948년 제주 4.3학살까지 저질렀다. 제주도민이 단독선거를 반대해 투쟁하자 미군정이 제주도민을 학살했는데, 학살당한 사람이 몇인지 정확히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당시 제주도민이 30만 명이었는데 그중 3만 명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도민이 학살됐다고 한다.

단선단정을 실시하려는 미군정에 맞서 통일정부를 추진하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가장 명망 있던 정치지도자인 여운형 선생은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총격 테러로 사망했다. 여운형 선생은 생전 12번이나 테러를 당했다.

하지만 이런 위험에도 우리 민족은 결코 분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48년 4월 19일, 남과 북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한데 모였다. 이 회의가 바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이다.

김구 선생은 단선단정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38선을 베고 죽겠다는 각오로 방북했다. 그런 희생적인 결단의 덕으로 남북 지도자는 연석회의에서 ▲외국 군대 즉각 동시 철수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 철수 후 내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 ▲외국군대 철수 후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해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꾸릴 것 ▲이 임시정부가 전조선 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수립할 것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합의를 맺었다.

그렇게 분단에 맞선 김구 선생은 결국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했다. 

국민은 김구 선생을 한국의 지도자로 기린다. 김구 선생이 목숨을 걸고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자주통일을 지향한다는 걸 전 세계에 선언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남과 북이 서로 갈등했기 때문에 분단이 일어났다며 우리 민족을 헐뜯는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방북해 남북 합의를 맺음으로써 우리 민족은 분단을 막기 위해 단합했음을 증명했다. 김구 선생과 같은 정치지도자들이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역사에는 남한 사람은 단선단정에 동조했고 이승만이 남한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였다고 기록됐을 것이다. 김구 선생의 방북은 구국의 결단이었다. 그리고 역사는 김구 선생의 자주통일국가건설 노선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승만의 단선단정은 매국매족 행위로 기록한다.

 

2. 전쟁 통일에 맞서 평화 통일을 외치다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에 큰 업적을 쌓았다. 특히, 대통령으로서 2000년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공동선언을 만든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들어온 건 바로 1971년 대선에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신민당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섰다.

당시 한국 사회는 반공반북 분위기가 지배했다. 박정희는 1968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국민에게 외우게 했다. 여기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해야 한다는 말을 넣어 반공 교육의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군사독재시대엔 반공 글짓기,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 웅변대회 같은 행사도 많았다. 1968년부터는 교련이라고 해서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시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했다.

이렇게 반공반북 분위기가 휩쓰는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가 된 후 첫 기자회견에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하며 남북교류를 통해 평화통일을 실현하겠다고 외쳤다. 그리고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미-일-중-소 4대국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 구상을 제시했다. 

지금은 통일이라고 하면 보수정당인 국힘당조차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당시엔 통일이라고 하면 북진통일을 의미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평화통일론은 시대를 앞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박정희는 선거 기간 김대중 대통령을 ‘빨갱이’라면서 비난했다. 그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은 내내 색깔론에 시달렸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김대중 대통령이 초대의장을 맡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 신군부가 김대중 대통령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로 체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에겐 늘상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평화통일을 주장한 대가가 참 혹독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그 고비를 모두 이겨냈고 끝내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자 첫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자신의 신념인 평화통일을 6.15공동선언에 담았다. 6.15공동선언은 오늘날 ‘통일의 이정표’로 불린다. 

북진통일론이 횡행하던 때에 누군가 목숨 걸고 평화통일을 외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도 여전히 북진통일론이 지배하는 나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대결이 고조되던 끝에 결국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지도 모른다. 

김대중 대통령이 시대의 선구자가 되어 평화통일을 주장했기 때문에 오늘날엔 반공이 아니라 평화통일이 대세가 되었다. 헌법만 봐도 김대중 대통령의 공을 느낄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통일을 주장하기 전인 1969년까지만 해도 헌법엔 ‘평화통일’이란 말이 없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1971년 대선에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후, 1972년에 개정된 헌법에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란 표현이 들어갔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 이후 개정하면서는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은…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3.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국시다


“우리의 국시는 반공보다는 통일이어야 한다.”

1986년 유성환 신민당 의원은 ‘통일’이 국시라고 말했다. 국시란 나라의 기본 방침이란 뜻인데,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반공이 팽배하던 사회분위기 속에서 통일이 국시라고 외친 것이다. 이 말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유성환 의원이 이 말을 하자 국회는 아수라장이 됐다. 다른 국회의원들이 일제히 소란을 피우며 반발했고 국회의장은 유성환 의원의 마이크를 끄고 제지했다. 그걸로 그날 회의는 종료됐다. 

당시 여당과 보수단체가 유성환 의원을 공격해 나선 건 물론이다. 검찰도 그 즉시 수사에 나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정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유성환 의원 체포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여당은 야당이 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은 채 체포동의안을 통과시켰다. 현직 국회의원이 의정활동으로 한 말 때문에 구속된 건 전무후무한 일이다. 요새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던 사건 중에 조국 사태가 있는데, 당시 논란은 조국 사태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반공’을 이야기하는 정치인을 찾아보긴 힘들다. 보수정당인 국힘당도 반공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나 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당시엔 달랐다. 반공이 국시였고, 통일에 대해서는 공산주의를 없앤다는 멸공통일, 공산주의를 이긴다는 승공통일이란 말만 울려 퍼지던 때였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3년 동안 매일 0.9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고 한다. 한번 국가보안법에 걸려들면 훗날 무죄판결을 받더라도 이미 낙인이 찍혀 본인은 물론 가족 친지까지 신원조회 결과 취업에 불이익이 있는 식의 사실상 연좌제도 살아 있었다. 간첩으로 몰렸던 정삼환 씨의 동생 정남도 씨는 "형보고 죽으라고 할 만큼 증오했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엔 한 선생님이 학생의 생일축하를 해주며 책을 선물했는데 지나친 친절을 베풀었다는 게 문제가 되어 처벌받는 일도 있었다. 반공 분위기가 극단으로 치닫다 보니 친절한 것조차 간첩으로 몰리는 근거로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성환 의원은 국회에서 역사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리고 통일이 국시라고 발언했다. 유성환 의원은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이른바 ‘신상 발언’을 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지금도 작년 10월 소위 국시 발언 파동으로 체포 구속될 때의 소신에 변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조국의 민주화와 조국의 자유민주통일을 위해서 선배 여러분과 같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서 영원히 죽는 길을 결코 택하지 않을 것이며 잠시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정치와 삶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한 정치인이 살아서 하는 정치는 물론 죽어서도 계속된다는 정치일 것입니다.”

유성환 의원의 ‘통일이 국시’라는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 뒤 불과 2년 만에 시대는 전변했다.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났고, 헌법이 바뀌었다. 바뀐 헌법엔 ‘평화통일’이 명시됐다. 유성환 의원이 말한 것처럼 ‘통일이 국시’가 된 것이다. 유성환 의원의 발언은 전두환 신군부독재에 파열구를 냈다. 유성환 의원 같은 정치인이 있어 새로운 시대가 올 수 있었다.

 

4. 한미동맹이 아니라 남북협력에 민족의 살길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엔 어떤 정치지도자가 필요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은 역사의 전환기이다. 그동안 미국이 세계 패권을 쥐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그런 미국에 의존해 안보를 지키려 하고 경제 성장을 도모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참조: [아침햇살125] 안보, 경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https://615tv.net/238)

우리나라는 한미동맹으로 안보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한미연합훈련을 하면 우리나라가 더 안전해지기는커녕 남북갈등, 북미갈등이 커져 오히려 안보가 불안해진다. 

우리는 경제적으로도 미국에 의존해서 성장하려 하지만, 지금은 정작 미국이 경제위기에 봉착해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나머지 중국을 상대로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동맹국까지 수탈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방위비분담금을 대폭 인상하고 미국 무기를 사며 미국에 투자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에서 받는 혜택이란 없고 오히려 미국에 우리의 이익을 빼앗기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우리의 살길은 남북협력에 있다. IBK경제연구소는 문재인 정부가 구상한 10대 남북경협 사업을 20년 동안 실행하면 남북이 얻는 경제 이익이 613조 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남북협력은 동북아협력으로 이어져 엄청난 경제적 파급력을 가져오게 된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북한과 4.27판문점선언을 합의했다. 온 국민이 4.27선언에 환호했다. 하지만 미국이 한미워킹그룹을 만드는 등 한국 정부를 하나하나 통제하는 바람에 남북협력은 모조리 막혀버렸다. 많은 국민이 경제가 어려워 힘들어 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남북경협을 해서 민생을 회복해야 할 이때, 미국이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다. 우리가 미국에 의존하는 날이 하루하루 길어질 때마다, 남북 경협으로 얻었어야 할 막대한 기회비용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이 부당한 내정간섭을 해오면 거부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우리 실리를 챙길 수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미국을 쫓아다니며 승인을 얻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래서 판문점선언은 10.4선언이 실현되지 못했듯 사라져버릴 위기에 놓였다.

특히, 올해 8월은 우리에게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올해 출범한 미국 바이든 정부는 3월에 한미연합훈련을 강행함으로써 대북적대정책을 이어갈 것임을 보여줬다. 미국은 8월에도 한미연합훈련을 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올해 열린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강 대 강, 선 대 선’ 원칙을 표방했다. 바이든 정부가 3월에 이어 8월에도 한미연합훈련을 강행하면, 북한은 더 이상 바이든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군사 대응을 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2017년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 특별히 핵무력을 이용해 군사시위를 한 적이 없다. 단거리 미사일 혹은 방사포를 시험한 적만 있을 뿐이다. 만약, 올해 8월 북미 사이에 군사대결이 펼쳐지면 핵보유국끼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다. 한국과 미국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매우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우리는 8월 한미연합훈련을 과감히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협력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 한다. 남북공동훈련으로 안보를 실현하고 남북경협에서 경제 성장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이런 역사적 결단을 할 정치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미국에 의존하던 시대를 끝내고 남북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할 역사의 전환기를 살고 있다. 이런 시기엔 역사의 전환을 결단하고 이끌어낼 김구, 김대중, 유성환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 역사와 민중은 김구, 김대중, 유성환을 잇는 출중한 지도자, 신념을 가진 선구자를 부르고 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 반공에서 통일로 국시가 바뀌었듯 미국에 의존하던 역사가 남북협력의 역사로 전환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 

 

이형구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