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10.

북러관계의 현재, 과거, 미래 ②

 

할힌골 전투

 

1936년 10월 25일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방공(반 코민테른)협정을 맺었다. 1937년 11월 6일에는 이탈리아도 협정에 동참한다. 이에 따라 어느 한 나라가 소련과 전쟁을 하면 협정에 참여한 나머지 나라들도 소련을 공격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독일이, 동아시아 전선에서 일제가 협공하면 소련은 몹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1939년 5월 28일 일제가 몽골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습격하면서 할힌골 전투가 발발했다. 할힌골은 할하강의 몽골 이름이며 이 지역은 일제와 몽골이 국경선 문제로 갈등을 빚던 곳이었다. 당시 몽골과 러시아는 동맹관계로 러시아군이 몽골에 주둔하면서 일제의 침략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 전투는 8월 말까지 이어졌으며 소련·몽골 측과 일제·만주국 측이 합계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수백 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투입한 대규모 전투였다. 사상자도 쌍방에서 수만 명이 발생했다. 9월 15일 양측이 휴전을 합의하면서 소련·몽골의 승리로 전투가 종료됐다. 이름은 조그만 국경 분쟁 같지만 사실상 하나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일제가 패전 사실을 숨기느라 이 전투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할힌골 전투는 2차 세계대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전투는 일제 정부나 대본영의 승인 없이 관동군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었다. 당시 관동군은 이런 군사 모험주의를 즐겼으며 시베리아를 점령하려는 북부 타격단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 북부 타격단 계획

 


그러나 할힌골 전투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일제는 북부 타격단 계획을 포기하고 해군을 중심으로 동남아에 진출하자는 남부 타격단 구상에 힘을 싣게 됐다. 할힌골 전투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츠지 마사노부 관동군 참모는 소련에 호되게 당한 뒤로 소련을 공격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미국 침공으로 방향을 선회, 진주만 공습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직전인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실제로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그런데 1936년 체결한 방공협정에 따라 일제도 소련을 협공해야 했지만 일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학자 스튜어트 골드먼 박사는 자신의 저서 『노몬한, 1939: 2차 세계대전을 이끈 붉은 군대의 승리』에서 소련이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독일의 소련 침공 시 일제가 호응해 소련이 동서 양쪽에서 전쟁하다 패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할힌골 전투와 관련해 김일성 주석이 이끈 항일부대 조선인민혁명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만주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김일성 주석은 이 전투가 일제의 소련 침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1939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에 일제의 후방을 공격해 소련을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북한은 일제의 주요 군사 보급로와 후방 기지를 파괴하는 후방 교란 작전이 일제의 소련 침공 저지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산 모범’이라고 평가한다. (오미영, 「할힌골 전투에 대한 남·북한 역사 인식 비교」, 『몽골학』 제72호, 한국몽골학회, 2023.2., 157~158쪽.)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이 할힌골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벌인 전투 가운데 대표적으로 1939년 8월 24~25일 진행한 지린(길림)성 안투(안도)현의 대사하(영경향), 대장강(류수촌) 전투를 꼽을 수 있다. 북한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대사하, 대장강 전투는 일제가 할힌골에 투입할 제6군을 새로 편성하느라 분주하던 시기에 진행한 교란작전으로 이틀 동안 일제 군대 500여 명을 소멸했다고 한다.

훗날 북한에서 인민무력부장(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최현도 이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회상기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 주석이 ‘소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구호 아래 적 배후 교란작전 방침을 제출했고 이 명령서를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가 여러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특히 대사하 전투에서 전사한 양형우 14연대 정치위원은 “일제놈들은 우리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다. 놈들은 지금 소련을 침공하고 있다. 저 원수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자. 소련을 피로써 옹호하자”라고 부대원을 격려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장병들이 어떤 목적과 자세로 전투에 임했는지를 보여준다.

1940년대 소부대 활동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지만 일본은 동쪽에서 소련을 협공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할힌골 전투를 통해 소련에 공포를 느꼈기도 했고 이후에도 김일성 주석이 이끈 조선인민혁명군이 만주에서 계속 백만 관동군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40년 하순부터 소련으로 넘어가 하바롭스크 인근에 주둔하였다. 여기서 훈련하면서 수시로 만주와 국내로 소부대를 파견해 정찰과 전투를 진행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만주에서 소부대 활동을 하던 중 독일의 소련 침공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북한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 주석은 지린성 왕칭(왕청)현 쟈피거우에서 소부대 책임자 회의를 소집해 새로운 전쟁 정황을 평가하고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역량 보존을 위해 무모한 정면충돌이나 불리한 교전을 피하고 대신 적후 교란작전을 진행하며 특히 군수 물자 수송로와 군수 물자 보급 기지를 기습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41년 8월 초에 조선인민혁명군은 왕청-라자 구간 도로 공사장 습격 전투를 벌였다. 이 지역은 소련-만주 국경 일대와 연결된 곳으로 일제가 병력을 대대적으로 집결시키던 곳이었다. 이 전투 외에도 투먼(도문)역 구내에서 군용 열차를 충돌시키거나, 허룽(화룡)현 터우다오진(두도구)에서 이동하는 적들을 습격하기도 했다. 1945년 9월 소련해군출판사에서 발간한 책에는 “1942년 초 북부조선에서 조선 빨치산들은 일련의 전투 작전으로 22대의 일제 비행기와 2개의 격납고를 파괴하고 2척의 유조선과 92척의 어선을 침몰시켰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록 소부대를 통한 소규모 전투들이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은 이런 전투를 끊임없이 지속하면서 관동군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관동군의 노조에 쇼토쿠 토벌대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쫓아 사령부를 옮기고 관동군은 물론 위만군(만주국군), 경찰, 철도경호대, 협화회까지 토벌에 동원해야 했다. 또 일제는 1940년대 들어 조선인민혁명군이 소멸했다고 선전했는데 이게 통하지 않게 되었다.

또 조선인민혁명군은 정찰을 통해 일제가 소련-만주 국경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소련을 위협했지만 사실 이는 위장이었고 병력이나 무기를 수송하는 척만 했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런 정찰 결과를 소련에 전달해 소련이 독일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도 했다. 당시 소련은 자국 병사를 직접 만주에 투입해 정찰하기에는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에 정찰을 많이 의존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만주는 물론 한반도와 일본까지 침투해 정찰 정보를 수집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인민혁명군이 소련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소련, 러시아도 이를 인정한다. 1945년 9월 소련은 ‘대일 전승 훈장’을 제정해 김일성 주석에게 수여했고, 1946년에는 적기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레닌 훈장 2회, 카를 마르크스 훈장 2회 수여도 있었다. 또 2009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조국전쟁(2차 세계대전) 60주년 기념 메달을 제작해 참전용사와 그 후손에게 수여했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이 메달을 받았다. 러시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친인 김일성 주석을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예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대일 전승 훈장. © Fdut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