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9.

추락하는 미국과 유럽의 군사력 ⑥

(이어서)

 

한때 세계 유일 초강대국을 자처했던 미국의 힘이 빠지면서 국제질서가 변화하고 있다. 군사력은 국제질서의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과 서방 진영의 군사력은 급속히 약해지고 있지만 반미·반서방 진영의 군사력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이를 살펴본다. 



 

 

 

초강대국 미국의 진짜 실체 



미국은 건국 이후 2021년까지 무려 224년 동안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켜 왔다.

전쟁 게임을 좋아하는 일부 누리꾼 사이에서 미국은 막대한 물자와 막강한 화력이라는 ‘현실판 치트키’로 적을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는 초강대국으로 통한다. 

미국에서 나온 전략 게임 ‘스타크래프트’에는 이른바 ‘치트키’가 있다. 예를 들어 게임 진행 중 화면에 ‘Show Me The Money(내게 돈을 보여줘)’라고 치면 병력, 건물 생산에 쓰이는 광물과 가스가 대량으로 보급된다. 또 ‘Power Overwhelming(넘쳐흐르는 힘)’이라고 입력하면 적의 어떤 공격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게 된다. 막대한 보급량과 절대 죽지 않는 무적 상태로 적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과 진짜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한 미국의 장군 조지 패튼은 “미국인들은 전쟁에서 져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지지 않을 것”이라며 “진다는 생각 자체가 미국인들에게 혐오스럽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왜 더 이상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걸까?」, 유튜브 채널 ‘지식 브런치’, 2021.8.26.)

그러나 위 말이 무색하게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벌인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진 못했다.

미국 공공정책 싱크탱크 후버연구소는 2016년 3월 10일(현지 시각) 「왜 미국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가?(Why Can't America Win Its Wars?)」라는 제목의 글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 번의 승리(파나마, 걸프전, 코소보), 한 번의 패배(베트남), 그리고 네 번의 모호한 결과(한국,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를 받아들여야 했다고 짚었다. 

그리고 2021년 8월 조 바이든 정부가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면서 미국에 또 한 번의 패배 이력이 추가됐다. 후버연구소가 모호한 결과로 꼽은 한국전쟁, 이라크전쟁, 리비아전쟁 역시 미군이 원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패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이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린 ‘왕년의 초강대국 미국’의 진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전쟁: 케산 전투(1968년 1월 21일~7월 9일)



케산 전투는 북베트남군이 베트남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결정적인 전투다.

1968년 1월 21일, 북베트남 정예군 325사단과 304사단이 호찌민 루트를 따라 케산을 둘러쌌다. 당시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특수부대원 2,100명이 케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호찌민 루트: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 남베트남을 연결하던 통로. 미군과 전쟁을 벌이는 북베트남군이 군대와 군수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보내려고 만들었다.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의 이름을 따 호찌민 루트(길)라고 불렀다. 케산은 호찌민 루트의 중간 길목에 있었다.

북베트남군이 몰려오는 신호를 감지한 미군은 긴장하며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의 진격을 알았다고 해도 마땅한 대비책이 없었다. 고산 지대인 케산에 주둔하는 미군은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마냥 버텨야 하는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공격이 임박하자 미군 사이에서는 북베트남군의 규모가 8만 명이라는 등의 사실을 알 수 없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겁을 먹은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대응하지 말고 후퇴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명령에 따라 도망가지 못하고 참호를 파야 했다.

백악관과 미군 지도부는 압도적인 물량과 화력으로 북베트남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굴복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랐다. 북베트남군 병사들이 굴복하기는커녕 쉬지 않고 몰려들며 미군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베트남군은 산속 동굴에 배치한 대포를 레일로 이동시켜 미군 진지를 향해 포격했다. 미군 병사들은 북베트남이 밤낮으로 포격을 퍼붓는 동안 참호 속에 숨어 꼼짝할 수 없었다. 포격 세례 때문에 미군 수송기가 케산에 보급 물자를 전하는 데도 큰 애를 먹었다. 

반면 북베트남군은 미군이 반격하면 동굴 안쪽으로 대포를 이동시켜 몸을 숨기는 전법을 썼다. 이 때문에 미군의 반격은 북베트남군에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 사령부는 곳곳에 매복한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신경 쓰느라 지원군조차 케산에 보낼 수 없었다.

당시 18세였던 미 해병대 대원 제임스 헤브론은 1968년 1월 21일 새벽 북베트남군이 장거리포로 미군을 정확히 조준해 포격하기 시작했다며 “그들(북베트남군)이 퍼부어 대는 포탄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첫날 하루만 300발이 떨어졌다. 77일간 지속됐던 포위는 그저 죽음과 파괴의 연속이었다”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두려움에 빠진 미군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또 미 해병대가 주둔하던 벙커의 포탄 껍질에는 “집에 가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 제발 이 자리를 물려주고 싶다” 등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공식 집계된 케산 전투의 미군 전사자 수는 1,602명이지만 미군이 실제로 느낀 공포와 심리적 압박은 훨씬 컸던 듯하다. 비공식 집계까지 포함하면 케산 전투에서 숨진 미군은 더욱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의 2대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 사령관을 맡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북베트남군을 아래처럼 솔직하게 평가했다.

 


“그들은 매우 강인했고 인내심이 대단했다. 하노이의 정치위원에서부터 호찌민 루트를 행군하는 말단 사병에 이르기까지 용맹한 군인들이었다. 지휘관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었으며 기강도 훌륭했다.”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유경찬 옮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329쪽)

“케산이 미국 내에 너무 자세하게 알려진 바람에, 이곳은 이미 심리적으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 국민은 우리가 케산 전투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케산은 정치적으로 미국의 디엔비엔푸가 될 것이다.”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유경찬 옮김, 앞의 책, 355쪽)



케산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의 목표는 전 세계의 시선을 북베트남군과 미군의 전투에 집중시켜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북베트남군의 의도는 통했다.

당시에 종군기자들은 방어에 급급한 미군을 보며 ‘케산도 디엔비엔푸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식의 보도를 쏟아냈다.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 3월 13일~5월 7일)는 베트남군이 식민 통치를 이어가려던 프랑스군을 패퇴시킨 결정적 전투였다. 

미군 지도부는 프랑스가 패배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미국이 고지를 점령하고 있으며 충분한 포병과 화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디엔비엔푸 전투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불안감이 자리했다고 한다.

결과를 볼 때 미군 지도부의 불안감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케산 전투를 기점으로 베트남전쟁의 기세는 북베트남군으로 기울게 된다. 베트남전쟁은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이 전쟁 종결을 약속한 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끝났다.

북베트남군을 지휘한 장군 보응우옌잡은 2013년 10월 7일 보도된 중앙일보와의 대담을 통해 “우리(북베트남군)는 프랑스군과 미군을 정확히 파악했지만, 그들은 베트남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들지 않았다. 우월한 무기만으로 충분히 이길 것으로 오판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닌 사람이라며 “아무리 첨단 무기로 무장했더라도 우수한 두뇌가 없으면 다 헛일”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구엔 지압, 역사 속으로」, 중앙일보, 2013.10.7.)

 

 

이라크전쟁: 나시리야 전투(2003년 3월 23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사흘 뒤인 2003년 3월 23일, 나시리야 전투가 벌어졌다. 나시리야는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의 남쪽 길목에 있는 도시다.

나시리야 전투의 상황은 실화를 각색한 영화 「블랙 호크 다운: 에스케이프」(2003년)와 드라마 「제너레이션 킬」(2008년)에서 잘 드러난다.

바그다드로 향하는 미 해병 제2원정여단의 진로를 따라 이동하던 제1방공여단 소속 507정비중대(507중대)의 일부는 모래 구덩이에 빠져 선두 차량과 멀어진다. 

507중대는 보급을 맡고 있어서 이라크군과 맞서 싸울만한 무기도 별로 없었다. 뒤늦게 후속 차량이 합류했지만 설상가상으로 507중대가 가진 GPS(위성항법장치)도 작동하지 않아 선두 부대가 간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이때 507중대의 보급 장교인 트로이 킹 대위는 갈림길에서 나시리야 시내 한복판을 통과해 바그다드로 가자고 결정했다. 그런데 이는 단 한 번의 전투 경험도 없던 킹 대위의 오판이었다. 선두 부대는 나시리야를 우회해 바그다드로 돌아갔지만, 연락이 끊긴 507중대는 이 중요한 정보를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507중대는 무작정 나시리야 시내로 들어섰다. 킹 대위는 규정에 따라 대원들에게 ‘공격받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무장도 변변찮은 데다가 정보도 없이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선 507중대의 행동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나시리야 시내에서마저 바그다드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1시간가량이나 헤맸다. 

결국 507중대는 뒤늦게 나시리야에서 빠져나가려 처음에 들어왔던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507중대의 동선을 파악하며 매복해 있던 이라크 정부군과 민병대의 공격을 받게 된다. 

507중대는 이라크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넘어 나시리야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다 선두 차량은 어찌어찌 운이 좋게 나시리야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부상을 입고 나시리야를 탈출한 선두 부대 대원들은 미 육군 8기갑사단과 만나 간신히 구출됐다고 한다.

하지만 뒤따르던 차량은 운이 없었다. 이라크군의 집중포화로 차량이 전복되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507중대 대원들은 내려서 교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도저히 이라크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나시리야 전투의 여파로 미군의 작전에도 차질이 생겼다. 본래 바그다드로 진격하려 한 미군 지도부는 기존 작전을 전면 백지화했다. 그리고 작전은 507중대 대원들의 구출을 중심으로 전환됐다.

2003년 4월 1일, 미군의 군사작전으로 507중대 대원 가운데 여성인 제시카 린치가 구출된다. 린치는 앞서 소개한 영화 「블랙 호크 다운: 에스케이프」의 실제 인물이다.

미국 국방부는 린치가 혼자서 이라크군에 끝까지 맞서 ‘람보’와 같은 대활약을 펼치다가 포로로 붙잡혔다고 밝혔다. 미국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연기한 람보는 미 육군 특수부대 그린베레 출신으로, 혼자서 적진 깊숙한 곳에 침투해 적을 쓸어버리는 전사로 묘사된다.

하지만 정작 린치는 자신이 전투에서 단 한 발의 총도 쏜 적이 없다며 국방부의 발표를 반박했다. 이후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려 한 미군의 위신은 크게 떨어지게 된다.

미국 중부사령부는 나시리야 전투에서 미군 12명이 실종되고 10명 남짓이 전사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미국 중부사령부의 존 아비제이드 부사령관은 이라크전쟁 개전 이후 미군이 가장 큰 저항에 부딪혔다고 발표했다.

아랍권 유력 매체 알자지라 방송이 밝힌 미군의 피해 규모는 미국 중부사령부의 발표와는 상당히 다르다. 알자지라는 나시리야 전투로 미군 103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린치를 영웅으로 만들려던 미국 국방부의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점에서, 미군이 나시리야 전투에서의 사망자 수를 상당히 축소해 공개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해볼 수 있다.

나시리야 전투는 미군의 군사력과 무능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 보여준 전투였다. 

미군의 패배는 킹 대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라크전쟁을 빠르게 끝내려 한 미군 지도부의 이른바 신속 진격 작전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군 지도부는 보급 부대가 따라오든 말든 상관없이 무리한 신속 진격을 기획했고 이 때문에 보급 부대가 선두 부대를 따라가지 못했다. 선두 대열에서 떨어진 507중대가 길을 헤매다 이라크군에 맥없이 패배한 것은 이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미군 지도부 자체의 판단력이 흐려져 있던 것이다. 

이라크 주민들과 무장세력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미군에 맞서 완강하게 끊임없이 저항했다. 이 때문에 후세인 정권을 몰락시키며 승리한 미군이 베트남전쟁 때보다도 더욱 큰 좌절감에 빠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마침내 끝난 이라크전, 미군은 무엇을 남겼나」, 한겨레21, 2010.8.26.) 

미국은 2011년 12월 18일 이라크에서 공식적으로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런데 이후 반미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이라크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미군을 파병했다. 2024년 기준 미군 병력 2,500명이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다. (「미-이라크, 미군주도 연합군의 완전철수 회담 시작」, 뉴시스, 2024.2.12.)

최근 이라크에서는 무함마드 시아 알수다니 총리를 중심으로 미군 철수가 공론화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침공을 받은 이라크 주민들의 여론이 미군 거부로 모아졌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레드윙스 작전(2005년 6월 27일~7월 중순)



미국은 2001년 9.11사태 이후 아프간을 침공했다. 9.11사태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 빈 라덴과 협력하는 반미 무장세력인 탈레반을 소탕하겠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20여 년 동안 끈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은 패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8월 16일 아프간 철군 결정에 관해 “더 이상 국익이 없는 전쟁에 계속 머무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이 아프간에서 완전히 철군한 다음 날인 8월 31일에도 다른 나라의 체제를 바꾸려는 군사작전을 다시는 벌이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미군이 2021년 8월 야반도주하듯 아프간에서 철수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프간전쟁 당시 미군의 총체적 난맥상을 보여주는 군사작전이 있다. 바로 2005년 6월 27일 미 해군 최정예 특수부대 네이비실이 투입된 레드윙스(붉은 날개) 작전이다. 

네이비실 10팀이 투입된 레드윙스 작전에서는 미군 19명이 전사했다. 이는 미군 특수전 사상 최악의 피해를 본 작전으로 기록됐다.

레드윙스 작전의 과정을 짚어보자.

아프간은 국토 대다수가 험준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빈 라덴 측근의 근거지가 아프간 쿠나르주 서쪽에 있다는 첩보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네이비실 10팀 정찰조 4명이 쿠나르주에 있는 사우탈로 사르라는 산의 경사면에서 수색 작전을 시작했다.

정찰조는 양치기 소년들과 맞닥뜨렸다. 아프간 전역에는 탈레반에 호응하는 주민들이 많았고, 각 주민이 탈레반 지지파인지 반대파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찰조는 발견한 민간인을 사살할 것인지, 살려 보낼 것인지를 논의했다. 풀어주자는 의견이 더 많아 양치기 소년을 풀어주게 된다.

그런데 1시간가량이 지나 정찰조 앞에 80~200명 남짓 되는 탈레반이 나타났다. 정찰조는 50명 남짓 되는 탈레반을 사살하며 분투했다. 그러던 중 한 정찰조 대원이 무전으로 작전 본부에 구조 요청을 했고 헬리콥터 8대가 출동한다. 이 가운데 정찰조에게 접근하던 특수부대원 16명이 탄 헬기가 탈레반이 쏜 로켓에 격추당한다. 정찰조 3명과 특수부대원 16명까지 더해 레드윙스 작전에서 네이비실 대원 19명이 사망한다.

정찰조 가운데 1명인 마커스 러트렐은 인근 주민 모하메드 굴랍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아났다. 굴랍의 집에서 치료를 받던 러트렐은 수색에 나선 미군에게 발견돼 고향인 텍사스로 돌아갔다. 

앞서 설명한 내용은 모두 러트렐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후 미국에 정착한 굴랍은 2016년 4월 11일 미국 매체 뉴스위크와 대담에서 러트렐이 진실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굴랍은 러트렐을 탈레반과 용감하게 싸운 영웅처럼 묘사한 책을 읽고 분노했다고 한다.

아래는 러트렐의 증언과 딴판인 굴랍의 증언이다.

굴랍에 따르면 정찰조를 내려준 미군 헬기의 소음이 워낙 커 인근 마을에 다 들렸다. 또 정찰조가 양치기 소년들을 붙잡아둔 시점에서 탈레반은 이미 정찰조를 발견했다고 한다. 탈레반은 정찰조가 양치기 소년들을 풀어줄 때까지 기다리며 상황을 살폈다. 이후 탈레반과 교전하던 정찰조 3명이 사망했고, 유일한 생존자이자 다친 러트렐을 자신이 구해 간호했다는 것이다.

또 정찰조와 맞닥뜨린 탈레반의 인원은 10명으로 러트렐이 말한 인원보다 훨씬 적었다. 굴랍은 러트렐과 만났을 때 탄창 11개가 꽉 차 있던 점을 근거로 러트렐이 탈레반과 맞서 싸우지 않은 것 같다고 주장했다.

뉴스위크와 대담한 레드윙스 작전의 관련자인 전직 미 해군 패트릭 킨저 역시 “러트렐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과장”이라고 말했다. 또 현장의 탈레반 대원들은 35명도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론 서바이버’ 과장·허구 투성이…아프간 은인 폭로」, 뉴스1, 2016.5.12.)

위 증언이 맞다면 네이비실은 작전을 시작하기 전부터 적에게 자신의 동선과 전략을 노출시킨 것이다. 

먼저 미군은 적진 한복판에 소음이 큰 헬기를 띄우면서 탈레반이 대비할 수 있도록 도운 꼴이 됐다. 소음을 들은 탈레반은 미군 헬기가 왔음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작전을 논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레드윙스 작전은 실패를 작정(?)한 작전이었던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을 떠나기 전 마지막 임무인 ‘카불 탈출 작전’으로 미군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불 탈출 작전의 실상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이든 정부가 미군 철수를 발표한 뒤 17일 동안 카불에 머물던 미군은 대혼란, 아수라장에 빠졌다. 미군은 값비싼 장비를 챙길 여력도 없이 군용기를 타고 카불을 빠져나가는 데 급급했다. 미군이 자신의 안전을 먼저 챙기는 상황에서 미군에 협조하던 아프간인 상당수는 카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임무가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미군과 외교관, 정보 요원들의 놀라운 기량과 용감한 덕분이다. 이것은 올바른 결정이며 미국을 위한 현명한 결정이자 최선의 결정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이 아프간에서 탈출한 정도로 “대단한 성공”이라고 안도했다. 이를 통해 미군이 아프간에서 탈레반에게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2022년 2월 24일~현재)



올해 7월 중순 기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2년 4개월이 넘어간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우크라이나에 많은 무기와 천문학적인 군수 물자를 지원했다. 

또 특수부대 경험이 있는 훈련 교관을 보내 우크라이나군의 작전 수립과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훈련을 도왔다. 숲 지대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는 방법, 구조 임무 등 훈련이 이어졌다. 훈련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교외에 있는 국토방위 훈련소 등에서 진행됐다고 한다.

미국의소리(VOA)는 2022년 7월 23일 보도 「[글로벌 나우] 미국 교관들, 우크라이나 장병 훈련 지원」에서 “표준화된 명령 체계와 새로운 전술 경험을 체득한 우크라이나 군대는 효과적인 서구식 전투 병력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미국으로선 직접 참전은 하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군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 성의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 보도처럼 미군의 도움으로 “표준화된 명령 체계와 새로운 전술 경험을 체득한 우크라이나 군대”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우크라이나군은 바흐무트 전투 등 중요한 전투에서 잇따라 러시아군에 패배하며 요충지를 넘겨줬다.

현시점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체 면적의 20%에 이르는 동남부지역(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헤르손주, 자포로지예주)을 합병했다. 러시아는 이후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와 가까운 하르키우 주변에서 공세를 더욱 높이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도왔는데도 우크라이나군의 패배가 임박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런 분석은 미국 내부에서부터 불거지고 있다.

지난 4월 18일 윌리엄 번스 CIA 국장은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군사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올해 말 러시아에 패배할 수 있다고 밝혔다. 패배로 몰린 우크라이나군이 미군의 군사 지원을 받아 가며 버티고 있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쏟아부어봤자 전쟁의 승패를 바꾸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계속될 미국 군사 패권의 몰락

 

 

 

 



앞서 살펴본 실전에서 미국이 패배한 공통 요인을 2가지로 꼽아볼 수 있다. 

첫째로 베트남군, 아프간군, 이라크군 등 상대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고 자기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한 점이다.

둘째로 첨단 무기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기 때문에, 첨단 무기를 동원하지 않은 일반 전투에서는 오히려 취약한 면모를 드러냈다.

지난해 10월 7일 발발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의 상황도 좋지 않다.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은 ‘하마스 소탕’이라는 목표를 이루지도 못했다. 이 가운데 미국은 이른바 3단계 휴전안을 앞세워 가자지구에서 발을 빼려 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 패권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처음부터 미국의 군사 패권이 ‘허상’이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김종성 역사 연구자는 냉전이 끝난 뒤 미국은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 이데올로기, 도덕성 등에서 한 번도 절대적 패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주장에 따르면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미국의 힘은 막강하지 않았으며 ‘초강대국이라는 이미지를 조작’해 패권을 행사해 왔다. 이 때문에 미국의 패권은 미국의 실체가 드러나면 한순간에 무너질 정도로 취약하다는 것이다. (「[주장]미국은 ‘이미지 전쟁’에서 패배했다」, 오마이뉴스, 2005.2.13.) 

전쟁을 부추긴 미국의 신보수주의(네오콘) 세력이 주장해 온 ‘고귀한 거짓말’이라는 개념도 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전쟁 명분을 거짓으로 정당하게 만드는 등 미 기득권에 이득이 되는 전쟁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네오콘, 그들의 진리는 거짓이다」, 한겨레, 2019.10.20.) 

최근 몇 년 새 미국은 직접 참전을 멈췄다. 그럼에도 국제 사회 곳곳에서 미국에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이 전쟁의 책임을 따지는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이로 미뤄볼 때 이미지 조작과 고귀한 거짓말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군사 패권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군사 패권을 잃은 미국의 민낯이 만천하에 생중계되는 국면이라 할 수 있다. 

적을 늘리고 다른 국가를 침략하며 생존해 온 ‘전쟁국가 미국’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앞으로 펼쳐지게 될 상황이 주목된다.

(끝)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