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0.

<몰락하는 제국주의> 차례

1. 서론
2. 제국주의 형성
3. 신제국주의 체제의 형성
4. 신제국주의 체제의 역사
5. 본질적 한계와 최후 위기
6. 전망


 

▲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지난 글615tv.net/308에 이어서)


3. 신제국주의 체제의 형성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제국주의 체제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1) 신제국주의 체제 형성의 배경

 


제국주의 국가들은 서로의 식민지를 빼앗으려다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도 컸다. 

1차 대전에서는 최대 2천 5백만 명이 사망했고 그중 민간인이 77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2차 대전은 민간인 3천만 명을 포함해 5천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1차 대전에서 사용된 돈은 2천억 달러 이상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우 5백억 달러를 지출했는데 지난 2백 년 동안의 정부 지출을 합친 것보다 많다. 영국은 이중 36%를 세금으로, 64%를 외국에서 받은 대출로 충당했다. 그 탓에 영국의 국채는 1차 대전 직전 7억 파운드였다가 1차 대전 이후 82억 파운드로 10배 넘게 급증했다. 

1차 세계대전 때 제국주의 국가들은 패전국을 약탈해서 전쟁 피해를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1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어 피해를 회복하고 경제 이익을 얻으려고 했다. 승전국들은 독일의 영토를 빼앗고 배상금으로 1천 3백억 마르크를 내게 했다. 1천 3백억 마르크는 당시 독일의 2년 치 국민총생산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외에도 탄광 채굴권을 프랑스에 넘기는 등의 여러 조항이 더 있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영국 대표로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한 뒤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독일 경제를 파탄 낼 것”이라며 배상금 규모가 독일의 경제활동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지속적인 평화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영국은 조언을 수용하지 않았고 케인스는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라며 대표단을 사임했다. 

케인스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독일의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1923년엔 1달러가 4조 2천억 마르크까지 치솟는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은 독일에 배상금을 지급하라, 지급하지 않으면 탄광을 점령하겠다는 식으로 압박했다. 거기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독일 경제는 붕괴한다. 이에 독일에서는 나치가 득세하게 됐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벌어진 2차 대전에서는 세계적으로 약 1조 달러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은 전체 주거지의 30%, 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는 주거지의 20%가 손상됐다고 한다. 앞서 소개했듯 1929년 세계대공황이 일어났었는데 2차 대전으로 큰 피해를 당하게 되자 제국주의 나라들에게는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패전국을 약탈해 전쟁 피해를 회복할 생각이었는데 독일의 사례를 보니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패전국을 마구잡이로 약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편, 2차 대전으로 전 세계가 고통을 겪는 와중에 이 전쟁으로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두 차례의 대전에서 본토에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대신 미국은 전 세계에 무기를 팔고 전쟁 자금을 조달해줌으로써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고 커다란 경제성장을 이뤘다. 

미국은 적국인 독일에도 무기와 석유 등을 판매했다. 미국 변호사 호스펠드 코언은 “(2차 대전 당시 문서를 보면) GM과 포드가 생산한 트럭과 탱크를 타고 미군이 44년 6월 유럽에 상륙했을 때 독일군도 똑같은 트럭과 탱크를 몰고 나와 미군이 당황한 사실이 있다”라고 밝혔다.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스피어는 “미국 기업이 제공한 합성석유가 없었다면 폴란드 침공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1941년 9월 독일이 수입한 석유제품 중 미국산이 94%에 달했다고 한다. 미국은 돈이 된다면 진영을 가리지 않았다.

이렇게 미국은 대공황을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뤄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미국의 실업률은 1940년 15%에서 1944년 1%로 되면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했다. 2차 대전 직후 미국은 전 세계 GNP의 50%를 차지했고 전 세계 금의 3분의 2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때 쌓은 경제력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질서를 재편하는 걸 가능케 했다.

제국주의 체제가 변하게 된 또다른 배경에는 사회주의의 성장이 있다. 1차 대전 말미인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첫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2차 대전 이후 북한·중국 같은 아시아부터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탄생해 세계를 양분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공산당을 비롯해 사회주의적인 세력이 맹위를 떨쳤다.

1, 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끼리의 경쟁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주의가 대두됐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를 본질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최우선 공적이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연대할 필요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GDP 비교. 미국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신제국주의 체제와 그 특징

 


구제국주의 체제에서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각기 난립해 각축을 벌였다면 신제국주의 체제에서는 미국을 정점으로 한 제국주의 질서가 구축됐다는 게 특징이다. 

새로운 제국주의 질서를 구축한 건 미국이다. 다른 나라들이 1, 2차 대전으로 국력을 소모한 반면 미국은 그 사이 압도적인 국력을 쌓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미일동맹을 맺고 유럽과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를 출범시켰다. 세계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하위동맹 체계로 재편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1944년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삼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출범시켰고 1945년 국제연합을 만들었다.

모든 제국주의 나라들이 단번에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를 받아들인 건 아니다. 특히 그동안 패권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게 된 건 1956년에 있었던 2차 중동전쟁, 수에즈 운하 사태였다.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1956년 친소정권이 집권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이에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이집트와 갈등을 겪던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러자 소련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을 규탄하며 보복공격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자칫 3차 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3차 대전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은 미국의 제지를 무시했다. 그러자 미국은 실력행사에 돌입했다. 소련이 공격해도 보호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영국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며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석유 제재를 했다. 심지어 항공모함을 파견해 프랑스와 영국을 위협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미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이집트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해버렸다. 프랑스와 영국이 패권국가의 지위를 미국에 넘겨주고 미국 중심의 신체제로 정리되는 장면이었다.

신제국주의 체제의 또다른 특징은 식민지를 실제로 점령해 직접 지배하는 구식민주의에서 벗어나 형식적으로는 독립됐지만 정치·경제·사회·군사적 측면에서 사실상 지배하는 신식민주의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구식민주의를 신식민주의로 바꾼 건 예방혁명 차원의 조치였다.

식민지 민중들은 2차 세계대전까지 지나오면서 독립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며 역량을 키워왔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각종 제국주의 나라의 침략을 연달아 받았다. 처음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는데 2차 대전 중 일본이 프랑스를 밀어내고 베트남을 강점했다.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망하며 철수했는데 그 틈을 타 프랑스가 베트남을 재차 침략했다.

이에 베트남 민중은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다. 베트남 민중들은 프랑스가 재차 침략한 1946년부터 싸우기 시작해 1954년 프랑스를 내쫓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가 쫓겨나자 이번엔 미국이 베트남을 노렸다. 미국은 1964년 한국, 호주 등을 이끌고 북베트남을 침략했지만 1973년 결국 북베트남에 패배해 퇴각한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5만 8천 명이 사망했고 111억 달러를 지출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강대국인 미국이 다른 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해 아시아의 작은 후진국을 공격하면 쉽게 승리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베트남이 미국이나 프랑스보다 돈이 많거나 무기를 잘 갖춘 건 아니었지만 그런 강대국을 물리칠 정도의 민중 역량을 갖추었던 것이다.

베트남 하나도 지배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과거와 같은 구식민주의 정책은 쓰려야 쓸 수가 없었다. 식민지를 직접 점령하려 들면 전 세계 도처에서 자주독립을 바라는 민중의 투쟁이 일어날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식민지 민중들이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면 사회주의를 선택할 가능성이 컸다. 한국의 경우를 봐도 1946년 동아일보가 미군정이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는데 이를 보면 사회주의에 찬성하는 사람이 70%, 공산주의를 선택한 사람이 7%였으며 자본주의를 선택한 사람은 14%에 불과했다.

그래서 제국주의 세력은 형식적으로는 식민지를 독립시켜주고 대신 보이지 않게 정치를 자기 입맛대로 좌지우지하고 경제 수탈을 계속하며 사상문화적으로는 반미반제자주의식을 마비시키는 신식민주의를 폈다. 

 

4. 신제국주의 체제의 역사

 

 

1) 냉전 시기

 


초기 신제국주의는 소련과의 냉전과 한국전쟁·베트남전쟁을 통해 구축되었다.

미국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자신의 주도로 첫 연합군을 꾸려 참전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34만 명이 참전했고 46개국이 의료 및 식량 제공 등으로 협조했다. 베트남전에서는 한국, 호주 등 7개국의 병력을 이끌고 북베트남을 공격했고 영국, 서독, 일본 등의 지원을 받았다. 

두 차례의 전쟁은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연대를 행동으로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7월 1일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한국전쟁은 유엔이 존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금석”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첫 선을 보인 신제국주의 체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미국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신생국가 북한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했다. 

정전협정에 날인한 마크 클라크 미군 사령관은 “나는 역사상 승리하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조인한 최초의 미군 사령관이라는 영예롭지 못한 이름을 띠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이 실패라는 감을 가지고 있다. 나의 선임자들인 맥아더와 리지웨이 장군도 동감할 것이다”라고 한탄했다. 한국전쟁 초기 미 국방장관이었던 조지 마셜은 “신화는 깨지고 말았다. 우리는 남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강대한 나라가 아니었다”라고 말했고 오마 넬슨 브래들리 미국 초대 합참의장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진행한 잘못된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국전쟁을 잊는 걸 택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미국 내에서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린다.

한국전쟁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0년에 걸쳐 벌어진 베트남전쟁에서도 패배했다. 베트남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으며 대규모 반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전 세계를 식민지 삼아 지배하던 제국주의 나라들이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국력을 구축한 미국을 중심으로 뭉쳐 아시아의 작은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연거푸 패배했다. 신제국주의 체제는 시작부터 수렁에 빠진 꼴이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도 금세 휘청거렸다. 미국은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를 시작시키며 달러를 기축통화로 만들었다. 미국은 달러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달러를 가져오면 금으로 바꿔주는 금태환제를 실시했다. 미국은 금 1온스(약 28g)를 35달러로 교환해주겠다며 달러의 가치를 고정시켰다. 

그런데 미국은 머지않아 브레튼 우즈 체제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 미 의회조사국의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3천억 달러 베트남전쟁에서 7천 4백억 달러를 썼다. 미국은 이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달러 통화량을 증가시켰다. 

이를 본 나라들은 미국이 발행한 달러를 모두 금으로 바꿔줄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됐다. 머잖아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먼저 스위스가 5천만 달러를, 프랑스가 1억 9천만 달러를 금으로 바꿔갔고 그후로도 스페인, 영국 등이 줄을 서서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 했다.

미국은 자칫하다간 국가부도 사태에 빠질 수 있는 비상 상황에 놓였다. 결국 미국은 1971년 8월 금태환제 중단을 선언했다.

그 후로도 미국의 경제는 꾸준히 악화했다. 미국은 무역적자가 해소되지 않자 무역적자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일본을 지목했다. 그리고 1985년 일본과 독일의 화폐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미국이 경제이익을 보게끔 하는 플라자합의를 강요했다. 일본은 반대했지만 플라자합의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플라자합의는 일본에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 불황을 가져왔다. 

이처럼 신제국주의 체제는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어 언제 몰락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2) 탈냉전 시기

 


신제국주의 체제가 몰락하지 않은 건 간발의 차로 소련이 먼저 해체됐기 때문이다. 1991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소련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자본주의가 먼저 무너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신제국주의 체제는 동구권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숨통을 틔웠다. 그리고 독점자본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자 신제국주의 체제에 균열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소련이 붕괴했으니 제국주의 나라들은 미국 아래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표적으로 유럽 나라들은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체결하며 유럽연합을 출범시키고 1998년 유럽 중앙은행을 만들었으며 1999년엔 유로존을 설립했다. 유럽이 독자행보를 벌인 것이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계속 하위동맹으로 묶어 두기 위해 군사력을 이용해 세계질서를 정리하려 나섰다. ‘테러와의 전쟁’이 이런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세계 각국이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월 20일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우리의 편에 서든지, 테러리스트의 편에 서든지를 결정하라”라며 미국의 편에 서지 않으면 적대국으로 간주하겠다고 윽박질렀다. 김민웅 전 교수는 2011년 9월 5일 “미국의 지배자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패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시 주먹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라며 ‘테러와의 전쟁’의 본질은 미국의 지배력에 동요가 오는 걸 차단하고 유럽과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력을 이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은 또다시 실패의 늪에 빠졌다.

미국과 제국주의 나라들의 경제는 회복되지 못하고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미국과 제국주의 세력은 소련이 해체된 후 동구권을 잠식하며 숨통을 틔웠지만 잠시뿐이었다. 경제위기 탈출구를 찾지 못한 독점자본들은 1990년대 말 IMF사태를 연쇄적으로 터트리며 아시아 국가들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에 투자한 외국 자본을 일시에 철수함으로써 외환위기를 야기시켰고 위기에 놓인 아시아 국가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IMF를 통해 금융시장 개방 등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식이었다. 

이 조치는 세계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한국을 살펴보면 한국의 경우 1997년 말 외국인 주식 보유액은 약 11조 원이었으나 2019년에는 593조 원에 이르게 되었다. 외국인 투자자는 삼성전자, 네이버 등 주요 대기업 주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나라 6대 은행 지분의 72%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 자본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또한 IMF가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하는 바람에 비정규직이 만들어졌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을 적게 주고 쉽게 해고할 수 있었다. IMF사태는 한국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냉전 시대에는 독점자본들이 이런 극단적인 수탈을 하지 못했다. 세계 민중이 사회주의를 지향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자 경제위기에 몰린 제국주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수탈에 나섰다.

IMF사태 후 10여 년이 지나자 또다시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찾아온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진 것이다.

미국은 달러를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양적완화를 강행해 기업에 돈을 퍼주어 부도를 막았다. 이런 조치는 미국의 자본가들의 배를 불릴 뿐 경제위기의 해법이 되지 못했다. 신제국주의 체제는 금융위기를 극복하지 못했고 만성적으로 저성장과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거기에 코로나19 사태까지 터지면서 세계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미국 내에서도 자본주의가 몰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2020년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회장이 “최악의 불황이 찾아올 수 있다”라며 “자본주의의 ‘위대한 리셋’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거나 헤지펀드의 대부로 불리는 레이 다리오가 “나는 자본가다. 그러나 심지어 나조차 자본주의가 망가졌다고 생각한다”라고 비관했다. 

군사적으로도 미국은 실패를 맛보고 있다. 미국은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2021년 20년에 걸친 전쟁 끝에 결국 탈레반에 패퇴했다. 미국이 2003년에 침공한 이라크에서도 결국 반미 정부가 들어섰고 2021년 10월 10일에 열린 총선에서 반미 정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미국은 올해 연말까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할 예정이다. 

신제국주의 체제가 실패를 거듭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반제자주 진영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련 붕괴를 보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함으로써 사상과 이념의 진화가 끝났다며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역사가 재개됐다고 해야 할까?

미국은 2028년이면 중국에 GDP를 추월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군사력에서도 북한, 중국, 러시아가 대륙간탄도미사일, 극초음속미사일, 핵추진순항미사일, 요격미사일 등의 첨단무기 분야에서 미국을 앞지르고 있다. 이런 현실에 2018년 2월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미국이 지난 8년 동안 F-35 전투기 단 한 종류를 개발하는 동안 러시아, 중국, 북한 등 경쟁국 및 적국은 34종의 새로운 핵 운반 시스템을 개발했다”라고 미국의 현실을 지적했다.

북·중·러 사회주의 반제자주 진영이 부상하면서 미국의 위상은 추락하고 있다. 그 결과 제국주의 나라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결속력이 약화되고 있다. 점차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갈등도 불사하거나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 러시아와 협력하려는 탈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가 호주와의 잠수함 계약을 두고 미국과 날 선 대립을 펴거나 독일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와의 천연가스관 연결을 강행하며 이탈리아가 중국의 일대일로에 동참하려 드는 것들이 그 실례이다.

애초에 미국과 제국주의 세력은 북·중·러를 압박해 개량화시키려고 했다. 과거엔 소련은 붕괴하고 중국은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듯했다. 하지만 반제자주 사회주의 강경노선을 펴는 북한을 굴복시키지 못했고 그 영향인지 중국과 러시아도 날이 갈수록 미국에 강경하게 맞서며 반제자주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개량화 시도가 파탄 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는 끊임없이 독점을 확대하는 게 본성적 특징이다. 그런데 현재 자본주의 세력권 안에서는 한계에 부딪혀 더이상 독점야욕을 채울 수가 없다. 독점을 확대하기 위해선 북중러를 무너뜨려야 하는데 이는 점점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북중러를 무너뜨리는 게 불가능해지니 제국주의 세력 안에서 그냥 북중러와 협력하는 게 현실적으로 이익이겠다는 판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은 제국주의 나라들에게 북중러를 제재하고 이들과 대립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국은 제국주의 동맹국에 이익을 안겨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국에 닥친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동맹국들에 국방비를 인상하게 하고 더 많은 미국 무기를 강매하는 등 약탈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 나라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탈미독자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이형구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