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9월 21일
기사 제목 : [아침햇살144] 지각변동: 유럽의 탈미독자화②
(지난 글에 이어서 계속)
3. 이탈리아와 일대일로
1) 일대일로
중국은 초강대국으로 성장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달성하는 게 중국인의 꿈이라며 ‘중국몽’을 국가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중국은 중국몽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 정책으로 동서양을 잇는 현대판 비단길(실크로드)인 일대일로를 추진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4년에 제창한 구상이다.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육지길(일대)을 연결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유럽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일로)을 연결하자는 계획이다. 일대일로는 한두 해 추진하는 한 때의 사업이 아니라 150년을 내다보는 전략이다.
일대일로 계획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아프리카, 유럽을 잇기 위해 도로나 철도, 송유관 등을 건설하게 되는 나라는 70여 개 나라에 이른다. 일대일로 연관 지역은 세계 GDP의 32%, 세계 상품무역의 39%, 세계 인구의 63%를 차지한다. 현재 일대일로에 참여하기로 한 나라는 140개 나라에 달하며 2020년 중반까지 추진 중인 사업이 2,600개가 넘고 3조 7천억 달러가 투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대일로는 그야말로 전 세계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는 사업이다.
미국은 일대일로를 극렬히 반대한다. 일대일로로 세계 패권이 중국에 넘어가지 않을지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국외교협회는 2021년 3월 ‘중국의 일대일로: 미국에 주는 함의’ 보고서에서 “많은 일대일로 참여국이 계획부터 건설까지 가능한 중국의 속도에 찬사를 보낸다”라며 “일대일로는 미국의 경제·정치·기후변화·안보·글로벌 보건 이익에 중대한 도전을 제기한다”라고 지적했다. 보고서 저자 중 한 명인 제니퍼 힐만 전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중국은 현재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미국보다 더 강력한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은 일대일로를 방해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일대일로가 “다른 나라를 빚더미에 빠뜨리는 부채 함정”이라며 세계 각국에 이 사업에 불참하라고 압박했다. 2015년 미얀마가 중국과 73억 달러를 투자해 철도, 항만 등을 건설하는 계약을 맺은 적이 있다. 그러자 미국은 미얀마를 압박해 사업 규모를 73억 달러에서 13억 달러로 축소하게 했다.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벌이는 ‘항행의 자유’ 작전에도 일대일로를 견제하는 목적이 있다. 남중국해는 일대일로 중 바닷길의 주요 관문이다.
미국이 아프간을 계속 지배하려고 한 목적 중에도 일대일로의 육로를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미국이 아프간에서 떠나자 곧장 일대일로 사업이 날개를 달게 되었다. 9월 2일 탈레반이 “우리는 고대 실크로드를 되살릴 수 있는 중국의 일대일로에 매우 큰 관심을 두고 있다”라며 일대일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일대일로 대응책으로 6월 12일 G7 회담에서 ‘더 나은 세계 재건(Build Back Better World, B3W)’을 발표했다. 서방국가들이 2035년까지 40조 달러를 확보해 개발도상국 사회기반시설 건설을 지원함으로써 일대일로와 유사한 미래전략과 주도력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뉴욕타임스는 “(B3W)의 규모와 야심은 2차 세계대전 후 유럽 재건을 위해 미국이 진행했던 ‘마셜 플랜’을 크게 넘어선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계획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건 중국이 일대일로로 세계 경제 부흥의 청사진을 내놓았는데 미국은 대체 뭘 제시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 각국에 중국만큼 혜택을 주지 못한다면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따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이런 초대형 전략을 추진할 경제 여력이 없다. 백악관은 B3W 설명자료에서 “개발투자수단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며 “개발투자수단을 늘리기 위해 의회와 협력하겠다”라고 밝혔다. 뚜렷한 자본 조달 방안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바이든 정부는 국내 사회기반시설 투자 예산을 확보하기에도 벅찬 형편이다. 바이든 정부는 2조 3,000억 달러 규모의 국내 사회기반시설 투자계획을 발표했지만 야당인 공화당은 규모가 너무 크고 증세엔 한계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G7 내에서 B3W에 대한 반감도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G7 정상회담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B3W로 신냉전이 벌어져 중국과의 무역, 투자에 위험이 초래될 것을 우려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B3W는 야심 찬 표현에 비해 매력이 부족해 보인다”라면서 “이를 추진할 지배적이고 새로운 구조가 없다”라고 꼬집었다.
2) 이탈리아의 일대일로 참여
미국이 일대일로를 막으려 적극 나서고 있는 와중에 2019년 3월 이탈리아가 일대일로에 참여하기로 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탈리아는 평범한 나라가 아니다. 이탈리아는 세계 7대 주요 선진국인 G7에 속한 나라다. G7 중 유럽연합 소속 국가는 독일·프랑스·이탈리아 이 세 나라인데, 이 중 하나인 이탈리아가 일대일로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 많은 나라가 일대일로에 참여하기로 했지만 대부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었고 유럽 중에는 동유럽이나 그리스, 포르투갈 같은 비주류 국가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참여하기로 하면서 일대일로가 유럽 선진국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영향력 약화와 중국의 부상을 알려주는 정치적 상징”이라며 “지정학적 균형의 이동이 확고해졌다”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미국은 이탈리아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은 “실망스럽다”라고 평했고 개릿 마퀴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중국의 약탈적 투자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중국 주재 27개국 유럽연합 국가 대사들은 “일대일로가 유럽연합 28개국 사이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라고 했다.
3) 이탈리아의 일대일로 참가 배경
이탈리아가 일대일로에 참여하기로 한 건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다. 이탈리아는 중국과 밀접한 경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은 2017년 기준 이탈리아의 7번째 수출국이며 2016년에 비해 22%나 성장했다. 수입으로는 2017년 기준으로 3번째 수입국이다.
이탈리아는 관광산업이 GDP의 13%를 차지하는 나라다. 세계 관광산업의 큰 손은 중국이다. 중국은 세계관광 지출 1위 나라로 2018년엔 2천 8백억 달러를 지출했다. 2위 미국이 1천 4백억 달러로 중국의 절반 수준이다. 중국인 해외 관광객 수는 앞으로도 계속 급속도로 증가할 전망이다.
관광산업의 비중이 큰 이탈리아는 중국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탈리아의 경우 2019년 중국인 관광객 수는 약 350만 명이었다. 2018년 320만 명보다 10% 성장한 수치였다. 이탈리아가 2019년 일대일로에 참여하기로 하자 2020년 중국인 내 이탈리아 관광 인기도가 전년 대비 28% 상승해 이탈리아의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단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많다. 이탈리아 공식 통계로만 32만 명이고 단기·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하면 40만 명이 이탈리아에 사는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에 중국계 공장도 상당하다. 이탈리아 의류 산업의 중심지인 프라토는 인구 20여만 명 중 3만 4,000명이 중국인이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공장이 5,000개나 있다고 한다. 가쓰오 히쓰미 일본 아이치대학교 명예교수는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 2만 8,000개의 중국계 기업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탈리아는 미국이 제재하는 화웨이 5G 장비도 도입했다. 올해 5월 20일 이탈리아 정부가 화웨이 장비 사용을 승인한 것이다. 그럴만한 것이 화웨이가 2019년까지 이탈리아 통신 시장에 투자한 금액이 30억 달러가 넘고 2020년엔 화웨이 이탈리아 대표가 3년 동안 31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렇듯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 중국과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탈리아 국가 운영과 국민의 삶에 있어서 중국의 영향력이 미국보다 비슷하거나 더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더군다나 이탈리아는 경제 성장이 시급하다. 이탈리아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탈리아 GDP는 2008년 2조 4천억 달러에서 2019년 2조 달러로 11년 동안 성장은커녕 오히려 후퇴했다. 그러니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미국의 압박을 따르기보다 실제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중국과 손잡길 선택하게 된 것이다.
알베르토 브라다니니 전 중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는 2019년 3월 1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인터뷰에서 “이탈리아는 자국 경제를 일으킬 수 있는 실리 외교를 하기로 판단해 일대일로 참여를 결정했다”라며 “서방국가들은 미국에 잘 보이기 위해 일대일로 참여를 반대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일대일로 양해각서(MOU) 서명식에 참석한 제노 다고스티노 트리에스테 항구 항만관리청장은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로부터 철수하는 마당에 이탈리아가 중국을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4) 전망
이탈리아는 2021년 6월 13일 G7 회의를 마친 뒤 일대일로 참여를 재검토하겠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G7 회의에서 미국이 일대일로의 대항마로 B3W 구상을 발표하며 경제 투자를 약속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에 중국 관영매체인 환구시보는 “유럽 국가들은 미국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면 안 된다”라며 “미국을 믿으면 나중에 결국 배신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가 일대일로 참여를 보류한 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이미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해진 상태라 중국과 교류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탈리아는 당장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들여 일대일로를 거부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 일대일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탈리아의 일대일로 참여는 유럽에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이탈리아는 독일, 프랑스에 이어 유럽연합에서 3번째로 비중 있는 나라다. 프랑스가 뚜렷한 탈미 흐름을 보이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하지만 유럽연합 주요 3국 중 독일, 이탈리아 2개국에서는 이미 탈미 현상이 뚜렷하다. 그만큼 유럽에서의 탈미독자화 흐름이 상당히 거세지고 있다.
4. 터키
나토 성원국인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나라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나라다.
터키는 2019년 12월 미국 무기 대신 러시아의 지대공 미사일 S-400을 구매하며 탈미독자화 행보를 하고 있다.
터키가 러시아 무기를 구매한 건 미국의 자업자득이다.
당초 터키는 미국에서 패트리엇 지대공 미사일과 F-35A 전투기 100대를 구매하고자 했다. 대신 터키는 미국에 패트리엇 미사일 기술이전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S-400은 5억 달러로 10억 달러인 미국 패트리엇보다 가격이 절반 수준이고 사정거리나 요격범위 등 성능도 우수하다. 게다가 러시아는 터키에 다음 세대 미사일인 S-500의 공동개발과 생산, 기술이전을 약속했다. 이쯤 되면 터키가 러시아 S-400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을 팔고 싶으면 경쟁자인 러시아보다 더 싼 가격,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미국은 더 비싼 가격과 불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도 우격다짐으로 무기를 강매하려 했다. 그래서 훌루시 아카르 터키 국방장관은 “미국의 무기를 사기만 하는데 신물이 난다”라며 “터키는 항상 사고 미국은 언제나 생산한다는 개념은 끝났다”라고 말했다.
터키가 미국에 혀를 차고 등을 돌리는 게 미국의 자업자득이 아닐 수가 없다.
터키와 미국은 미사일 구매 문제에 앞서 관계가 틀어지는 계기가 있었다.
터키에서는 2016년 7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군이 시리아전에 참전하기 위해 터키 인근에 있다가 러시아 첩보 자산을 통해 터키 군부의 쿠데타 움직임을 포착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몇 시간 전에 러시아가 첩보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군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메블류트 차우쇼울루 터키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우리를 가장 많이 도운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군부로부터 피신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 광장, 공항으로 나가 정부에 대한 지지와 단결을 보여달라”라고 국민이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이에 터키 국민은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가며 군부에 맞섰고 6시간 만에 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터키는 쿠데타 배후로 미국을 지목했다. 터키는 쿠데타 주도자가 미국에 망명한 펫훌라흐 귈렌이며 앤드루 브런슨이라는 미국인 목사가 귈렌 추종 조직을 도와 쿠데타를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은 쿠데타 세력 공소장에 미국 연방수사국과 중앙정보국이 테러 지도부를 훈련시켰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터키는 미국에 귈렌을 송환하라고 요구했으나 미국이 이를 거절하면서 터키의 의심을 더했다.
터키는 원래 친미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다. 터키는 주요 공군기지를 미국에 내주고 중동의 여러 전쟁에 이용하도록 허용하였고 핵무기 보관까지도 용인했다. 그런데 이 쿠데타 사건을 주요 계기로 터키는 미국과 멀어졌고 반면 러시아와는 가까워졌다. 이런 과정이 터키가 미국 무기 대신 러시아 무기를 사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국은 터키의 S-400 구매에 노발대발하며 2020년 12월 14일 터키를 제재했다. 그러나 터키는 이게 동맹이냐며 뚝심 있게 러시아 무기 구매를 밀어붙였다.
차우쇼을루 외무장관은 2020년 12월 17일 “미국이 제재한다면 이에 보복하는 조처를 하겠다”라고 밝혔다. 에르도안 대통령도 2020년 12월 20일 TV연설에서 “제재로 터키를 위협하는 자들은 결국 실망하게 될 것”이라며 “터키는 주권을 사용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8월에는 터키가 러시아와 S-400 미사일을 추가로 도입하는 계약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미국의 제재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고민에 빠진 것은 미국이다.
미국과 나토는 인시를릭 공군기지 등 터키에 여러 군사기지를 두고 이용하고 있다. 터키는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길목에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그중 퀴레직 공군기지는 나토의 레이더 기지이고 인시를릭 기지의 경우 미국이 B-61 등 핵무기를 배치할 정도로 중요 전략 거점이다. 인시를릭 공군기지는 걸프전과 이라크전, IS 격퇴전, 시리아전 등등에서 최전선 거점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9년 12월 15일 미국이 러시아 미사일 구매를 이유로 제재를 하면 인시를릭 공군기지와 퀴레직 공군기지를 폐쇄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바 있다. 만약에라도 터키가 완전히 러시아와 밀착하면서 미국과 나토를 등지기라도 하면 미국 입장에서도 상당히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미국이 터키를 무한정 압박할 수만은 없는 상태다.
미국은 터키가 자기 이익에 따라 자주적으로 행동하려 드는 걸 가로막으면서도 정작 터키가 미국에 굴복하지 않고 주권을 행사하자 강도높게 제재하지 못한다. 미국이 터키의 신경만 건드리는 꼴이다. 터키는 그런 미국에서 벗어나려는 탈미독자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터키는 나토 가입국이며 나토의 주요 군사거점이다. 터키는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와 함께 미국이 냉전 이후에도 핵무기를 배치할 정도로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이러한 터키의 변화는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5. 아프간 패전
아프간전쟁을 두고도 미국과 유럽 사이에 갈등이 숱하게 불거졌다. 미국이 나토와 협의 없이 이기적이고 일방적으로 군사작전을 펴는 바람에 유럽의 불만이 커졌다.
미국은 탈레반과 2020년 2월 29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유럽은 미국이 이렇게 아프간을 떠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2020년 12월에 열린 나토 외무장관 회의에서 미국이 앞으로도 아프간에서 지원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올해 2월에는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이 “탈레반이 국제 테러 분자들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라며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엔 아프간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나토 회원국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아프간 철수를 강행했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미국이 회의를 열긴 했지만 이미 미군이 철군하기로 결정한 상황에서 나토가 단독으로 아프간에 주둔한다는 선택은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식적인 협의였다고 말했다.
미국이 아프간 철수를 강행하자 나토는 자국민 대피를 위해 미군의 철수 완료 시점을 연기해달라고 요구했다. 8월 24일엔 미국이 철수를 완료하겠다고 밝힌 시점인 8월 31일을 일주일 앞두고 G7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나라들이 자국민을 안전하게 대피하기 위해 철군 시한을 늘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계획된 대로) 8월 31일까지 철군을 완료하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라고 못 박았다. AP통신은 “G7 지도자들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충돌했다. 결정은 미국이 한다는 체념 섞인 인정이 있었다”라고 상황을 전했다.
이러자 유럽에서는 아프간 철수를 두고 미국에 불만이 차올랐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아프간 국민, 서구 가치와 신뢰, 국제 관계에 재앙”이라고 말했다. 아르민 라셰트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대표는 “나토 창설 이래 겪었던 가장 큰 실패”라고 비판했다.
이에 유럽이 미국에서 벗어나 독자성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진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9월 15일 유럽의회 국정연설에서 “유럽연합은 자체적 군사력을 보유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의지가 없었던 것”이라며 유럽연합군 창설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이어서 “이제는 유럽이 한 단계 더 도약할 때”라며 “내년 상반기에 소집될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유럽연합군 창설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9월 2일 “앞으로 군을 통합하고 의지뿐만 아니라 행동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고 9월 9일엔 독일 국방장관이 “유럽은 전략적 행위자로 간주돼야 한다”라며 유럽연합군 창설을 지지하기도 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이전부터 독자적인 유럽연합군 창설에 적극적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8년 11월 “우리는 중국, 러시아, 심지어 미국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라며 “우리가 진정한 유럽의 군대를 갖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유럽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이 나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유럽군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프간전을 계기로 미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탈미독자화 움직임이 유럽에서 한층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6. 결론
유럽 주요국인 프랑스의 경우 탈미움직임이 있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한다. 미국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는 독일, 이탈리아, 터키 그리고 아프간전 패배를 둘러싼 갈등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반발과 탈미독자화 움직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동시에 유럽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유럽으로선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있는 지금보다 중국,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게 실익이 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유럽은 중국, 러시아와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유럽의 탈미독자화와 유럽에 대한 중국,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이 두 가지가 유럽의 대세가 되고 있다.
(끝)
이형구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