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4년 04월 13일
기사 제목 : [아침햇살293] 미국은 왜 ‘판문점 도끼 사건’에서 전면전을 피했나
1. 판문점 도끼 사건…엇갈리는 주장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미 양군이 충돌해 유엔군사령부 소속 미군 장교 2명(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토마스 배럿 소위)이 사망했다. 한국전쟁 이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군사 충돌로 미군이 희생된 건 처음 있는 일로, 특히 미군 장교가 사망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판문점 도끼 사건으로 촉발된 인민군과 미군의 난투는 4분 남짓, 난투 이후 북미 간 전면전 위기가 고조된 기간은 3일이었다.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판문점 도끼 사건은 당시까지 ‘한국전쟁 이후 북미 간 가장 전쟁에 가까웠던 사건’으로 평가된다.
판문점 도끼 사건의 과정은 평양 주재 헝가리 대사관의 보고와 헝가리 외무성 본청의 보고, 러시아 모스크바와 방글라데시 다카 주재 헝가리 외교 공관에서 송부한 북한의 공식 발행 자료, 미국의 자료 등에서 확인된다. (김보국, 「8.18 판문점 도끼 사건 연구 헝가리 외교문서를 중심으로」, 『아세아연구』 65권 1호, 2022, 154~177쪽.)
당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한국군과 미군, 인민군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이렇다 할 규칙이 없는 ‘무질서 상태’였고, 인민군과 미군의 초소도 따로 정해진 구역 없이 가까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인민군과 미군이 언제든 충돌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8월 3일 유엔군 경비대 작업반은 가지가 무성한 미루나무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유엔군 3초소가 위험하다면서 안전을 위해 미루나무를 베어낼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8월 6일 미군은 미루나무를 베어내려 했다.
하지만 인민군이 반대하면서 양측은 무성해진 미루나무의 가지만 쳐 내는 것으로 구두 합의했다. 이 미루나무는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에 있었고, 인민군의 초소와도 가까웠다.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께, 한국군을 대동한 미군 병력 14명은 도끼로 미루나무를 자르려 시도했다. 인민군은 미군이 하려는 건 가지치기가 아니라 벌목이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그럼에도 미군은 작업을 강행하려 했고 인민군이 대응하면서 양측 간 난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인민군에 의해 부상당한 미군 장교 2명은 후송 중에 사망했다.
그런데 판문점 도끼 사건을 두고 북한과 미국의 주장이 엇갈린다.
북한은 판문점 도끼 사건 당시 미군으로 구성된 “불한당 14명”이 불법적인 나무 자르기를 그만둘 것을 요구한 북한 측 경비 인원들에게 먼저 도끼 등 흉기를 휘둘러 폭력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북한 측도 “단호한 자위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통일문화 가꿔가기49] “판문점 도끼 사건”이 남긴 숙제를 풀려면」, 자주시보, 2018.8.19.)
충돌에 관해 보고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줘라. 한국 노동자들은 놔두고 미군 놈만 골라서 본때를 보여줘라. 총은 쏘지 마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 토지, 1999, 81~82쪽.)
북한에 따르면 인민군 경비대원들은 배럿 소위가 벌목에 사용하던 도끼를 던지자 이를 받아 다시 던졌고, 도끼를 맞은 배럿 소위는 즉사했다. 인민군은 몸싸움에서도 미군을 압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보니파스 대위가 사망했다. 결국 사망자 2명과 부상자 5명을 낸 미군은 남측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현대사1 1945~1957』, 도서출판 4.27시대, 2018, 212쪽.)
당시 판문점에서는 한국군과 미군, 인민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사소한 적대 행위라고 할지라도 불똥이 튀어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판문점 도끼 사건의 발단은 미루나무를 자르려 한 미국의 ‘선제 도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미루나무 작업과 관련해 인민군의 동의를 얻지 못한 점은 숨기고 인민군에 의해 자국 장교 2명이 사망한 점만 부각했다.
일부에서는 판문점 도끼 사건과 관련해 미국이 자신의 책임을 덮으려 자국 장교의 사망과 북한의 호전성을 강조한 것 아니냐는 평가도 제기된다.
2. 북한과 미국의 대응
북한은 판문점 도끼 사건이 벌어지자 “미제국주의자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전쟁 도발의 구실을 찾기 위해 계획적인 도발 사건을 꾸며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전쟁을 유발하려 판문점 도끼 사건을 조작했으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담하고 현명”하게 대처해 위기를 극복했다고 강조했다. (자주시보, 위의 기사.)
판문점 도끼 사건에 앞서 북한은 미국에 적대 행위를 하지 말라며 여러 차례 경고해 왔다.
허담 북한 외무성 부상은 1976년 4월 19~24일 우호국인 헝가리를 공식 방문했다. 허담 부상은 평화적이고 외세의 간섭 없는 통일 정책을 지속할 것이지만 엄중한 상황 하에서 최고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또 ‘조선’은 모든 사태에 대비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사안인 미군 철수에 총력을 기울여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두 달 뒤인 6월 28일 판문점에서는 377차 군사정전위원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북한 측은 1976년 5월까지 미군과 한국군이 정전협정을 1만 2,900회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북한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에만 하늘과 땅·바다에서 2만 3,800여 건, 1975년에는 2만 8,510여 건의 군사 도발을 했다. 또 미국은 1976년 1월부터 7월 사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을 향해 400여 건의 적대 행동을 감행했다.
8월 5일에는 중·동부 전선 비무장지대에서 유엔군의 총격이 있었다. 이에 관해 북한 외무성은 당일 성명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의 군대와 남조선 ‘꼭두각시’ 군대가 공동으로 벌인 도발”이며 미국의 “전쟁 준비”와 “침략 의도”로 언제든지 전쟁이 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미국이 북한을 강하게 적대하는 흐름 속에서 미국의 의도적 도발로 판문점 도끼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이 숫자도 더 많고 인민군과 충돌이 벌어져도 어렵지 않게 해결하리라는 자신이 있었을 법하다. 그런데 정작 난투에서는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하는 등 오히려 미국이 밀렸다.
판문점 도끼 사건이 벌어진 당일 주한미군은 북한에 대응해 데프콘3(예비 경계 태세)을 발령했다.
김일성 주석은 판문점 도끼 사건 다음 날인 8월 19일 오후 5시, 최고사령관 명의로 인민군에 전투 태세령을 내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항목’) 인민군, 노농적위대원, 붉은청년근위대원 등 북한의 모든 병력이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 주석은 “‘판문점 도끼 사건’으로 떠는 것은 우리 인민이 아니라 미제”, “미제의 발광을 하나의 시대착오적인 정신착란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미제의 발광은 어디까지나 서푼짜리 몸부림”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판문점 도끼 사건에 관해 ‘전쟁을 일으키려 한 미군의 의식적인 도발’이라고 봤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명령에 따라 전 국가적인 동원령을 주도했다고 한다. (정창현, 위의 책, 81~82쪽.)
8월 19일 조선중앙통신이 발표한 성명은 미국이 계획적 도발로 한반도의 긴장을 극대화해 전쟁을 개시하려 하고 있으며, 미 대통령 제럴드 포드와 국무부장관 헨리 키신저가 사실관계를 왜곡해 북한을 비방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러한 미국의 도발이 지속될 시 미국이 이후 야기될 일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일관된 태도를 보인 북한에 비해 미국의 대응은 갈팡질팡했다.
판문점 도끼 사건 직후 유엔군사령관 겸 미 육군대장 리처드 스틸웰은 이른바 폴 버니언 작전을 세웠다. 폴 버니언은 미국 전설에 나오는 거인 나무꾼인데, 상당히 거창한 작전명이다. 미국은 작전명을 이렇게 붙일 만큼 북한을 위협적으로 여기고 있었던 듯하다.
이후 8월 21일 미 경비병 1개 소대, 미군 전투 공병원 30여 명과 한국군 특전사 대원 60여 명 등 무장병력은 미루나무에 사다리를 세워 전기톱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 과정에서 미군은 인민군의 경계초소와 차단기를 망가뜨렸다. 또 공중에서 헬리콥터로 작전을 지휘하며, 현장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필요시 개입을 위한 무장병력 500명을 추가로 대기시켰다. (김보국, 위의 논문.)
미국은 폴 버니언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동해와 한반도 인근에 무장 병력을 집결시키며 북한을 자극했다. 폴 버니언 작전은 정전협정 이후 가장 규모가 큰 한미합동 군사작전이었고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한미의 육·해·공 병력이 대거 동원됐다. (「잊지 말아야 할 그날의 이야기...8.18 도끼만행사건」, 내외통신, 2015.9.30.)
작전 기간 미국은 데프콘3을 데프콘2(공격 준비 태세)까지 끌어올렸다. 주한미군의 전쟁 대비 태세가 데프콘2까지 올라간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군 병사 82명이 북한에 포로로 붙잡힌 푸에블로호 사건 때만 해도 데프콘2가 발령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미국이 판문점 도끼 사건에서 자국 장교의 사망을 심각하게 바라봤던 것이다.
작전에 따라 주일미군기지에 있던 항공모함 미드웨이도 전폭기 75대를 싣고 동해로 들어왔다.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는 전투기 40대가 모인 2개 전투단이 한국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F-111 20대와 B-52 폭격기들도 미 본토, 괌 공군기지에서 한반도로 향했다. 미국은 북한과 교전 상황을 대비한 전쟁계획도 세웠다. (김연철, 『70년의 대화』, 창비, 2018, 132~133쪽.)
또 미국은 육군 1만 2,000명가량과 해병대 1,800명에 더해 미 해군 7함대와 B-52 전략폭격기 3대도 추가 배치했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두고 김일성 주석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도발이 지속되면 적절한 조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인민군은 이에 따라 미군이 미루나무를 어떻게 할지 지켜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짚어볼 건 폴 버니언 작전 당시 스틸웰이 미루나무 전체가 아닌, 미국의 관점에서는 ‘벌목’이고 북한의 관점에서는 ‘가지치기’가 될 수 있는 미루나무의 중간 지점만 잘라낸 점이다. (김보국, 위의 논문.)
인민군은 이번에는 미군의 미루나무 작업을 문제 삼지 않았다. 미군의 작업은 3일 전 판문점 도끼 사건 때와는 사뭇 달랐는데, 북한의 눈치를 살피며 상당히 조심스럽게 작업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이 또다시 미루나무를 멋대로 자르려 드는지 예의주시했고, 미군이 선을 넘지 않자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 주석은 ‘사람이 죽었으니 (미국에) 유감 표명하라. 푸에블로호 사건 때도 미군이 사과하지 않았는가’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정창현, 위의 책, 81쪽.)
폴 버니언 작전이 끝난 직후인 8월 21일 오후 12시경, 한주경 북한 측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는 김일성 주석이 지시한 대로 유감 표명을 미군에 전달했다. 북한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사건들이 또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쌍방이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라고 미국에 유감을 표명했다. (「북한 역대 유감 표명 살펴보니…」, KBS, 2015.8.25.)
특이한 것은 미국이 “쌍방이 노력”할 것을 강조한 북한의 유감 표명을 ‘사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김보국, 위의 논문.) 미국은 북한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판문점 도끼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한국군, 미군, 인민군이 뒤섞여 있던 만큼 ‘기싸움’이 흔했다. 미국으로서는 판문점 도끼 사건을 통해 인민군을 때려눕히거나 사살하는 등 기싸움에서라도 이겨보려 했으나, 오히려 강경한 북한의 태도에 기세가 밀렸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일화가 있다.
미루나무를 자른 뒤, 함께 온 한국군 특전사들이 북한에 보복하겠다며 인민군 초소를 공격했다. 그러자 미군은 크게 당황해하며 한국군을 말렸다고 한다.
미국은 폴 버니언 작전을 통해 북한이 미루나무 자르기 작업을 또다시 방해하면 개성을 점령하고 황해도 연백평야까지 진격해 전면전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인민군 전차 부대가 남하하면 전술핵을 사용할 것을 검토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핵전쟁이”…‘꼬꼬무’, 폴 버니언 작전 비밀 문서 공개」, 톱스타뉴스, 2021.12.24.)
북한을 상대로 전면전까지 검토했던 미군은 이와 비교하면 수위가 낮은 한국군 특전사의 돌출 행동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미루나무 한 그루를 벌목하겠다며 무력을 동원했을 때와는 다른데, 애초 전쟁계획을 실행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장관 헨리 키신저는 8월 18일 판문점 도끼 사건 대응에 관한 회의에서 ‘인민군을 권총으로 쏴 죽여야 했다’, ‘북한이 미국인 2명을 때려죽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라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미국의 대외 정책을 주도하는 국무부장관이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인민군을 상대로 무력 대응을 강조한 점이 주목된다.
하지만 실제 과정을 보면 미국은 북한과 전면전을 벌이기는커녕 인민군을 사살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폴 버니언 작전 때 미국의 무력 동원은 인민군에 당한 굴욕을 덮으려는 미국의 허세였을 수 있어 보인다.
미국은 전면전을 계획하면서도, 전면전으로 치달을 상황을 피하려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판문점 도끼 사건 당시 미국이 과연 북한과 전면전을 실제로 벌일 의지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3. 결론
판문점 도끼 사건은 미군 장교가 인민군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었지만 물러선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판문점 도끼 사건 이전까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따로 경계가 없었고 한국군, 미군, 인민군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1976년 8월 28일 군사정전위 381차 회의에서 미국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도끼 등 흉기 반입을 금지할 것과 구역을 나누는 질서 변경을 제의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현대사1 1945~1957』, 도서출판 4.27시대, 2018, 214쪽.)
실제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는 인민군 구역과 미군 구역을 구분하는 턱과 경계가 생겼다. 이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는 지금까지 판문점 도끼 사건과 같은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판문점 도끼 사건 40년째인 2016년 8월 18일,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대변인은 담화에서 “판문점 도끼 사건은 역사에 심각한 교훈을 남겼다. 그것은 침략자, 도발자들에게는 오직 수치와 죽음만이 차례진다는 것”이라며 “도끼를 들고 덤벼들면 도끼에 맞아 죽고 핵몽둥이를 휘두르면 미 본토가 핵참화 속에 잿가루가 되고 만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문점 도끼 사건에서 미국은 자국 장교가 숨졌음에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결과로 볼 때 미국이 무력을 동원해 ‘처단’한 건 고작 미루나무 한 그루의 일부였던 셈이다.
1970년대 미국 사회 전반은 베트남전쟁에서 북베트남에 패배했다는 충격으로 자신감을 잃고 사기는 바닥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1968년)과 EC-121 격추 사건(1969년) 등에서 북한에 연거푸 당하기만 했다.
아마도 미국으로서는 판문점 도끼 사건을 통해 북한에 수모를 갚아주겠다고 벼르고 있었을 법하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미루나무 한 그루의 일부를 잘라내는 데 만족해야 했던 셈이다.
북한은 미국이 도발을 감행하면서도 끝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를 자국의 ‘굳건한 무력’ 때문으로 봤다.
또 북한은 판문점 도끼 사건을 두고 북한 주민들이 당과 수령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사상 의지로 굳게 뭉쳐 적들의 침략책동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으로 “적들의 무모한 도발 책동을 성과적으로 저지시키고 조국의 안전과 혁명의 전취물을 믿음직하게 지켜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북한은 판문점 도끼 사건에서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고 전쟁 위기도 막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판문점 도끼 사건은 북한의 전쟁 대비 태세가 미국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줬다.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