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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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서)


나. 정치외교


북한의 대미 외교는 ‘강대강’이라 부를 만큼 강경 그 자체다. 물론 미국이 북한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대화를 요구하면 대화도 한다. 하지만 미국이 대북 적대 정책을 앞세우면 북한은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대응한다. 

2006년 10월 22일 자 노동신문은 논설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양보하고 타협의 길로 나가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을 무서워하면 주눅이 들어 제 할 소리도, 제 할 일도 못 하며 자주성, 주체성을 잃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비위를 맞추게 된다”, “미제의 힘의 행사에는 힘으로 맞서 무자비한 징벌로 대답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지키는 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대미 저자세 외교에 익숙하다. 미국에 쓴소리라도 했다가는 군사, 경제, 외교적인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 반미 성향의 국가들이 미국의 보복을 받아 내전에 빠지거나, 정권 교체를 당하거나, 경제 보복을 당해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련 해체 후 첫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미국에 저자세를 보이는 수준을 넘어 아예 미국의 앞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옐친 대통령은 미 재무부나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신자유주의 집단의 조언을 받아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 냉전 시기 미국과 쌍벽을 이루던 소련의 국력이 급격히 무너져 러시아는 이류, 삼류 국가로 전락했다.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은 소련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면서 국부 유출, 극소수 부자(올리가르히)의 등장, 극심한 빈부격차, 부정부패 만연, 물가 폭등, 범죄 폭증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경제 붕괴를 거듭한 끝에 1998년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을 선포하고 말았다.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 국방력도 무너뜨렸다. 1992년 280만 명에 달하던 러시아군은 1999년 12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러시아군은 1994~1996년 1차 체첸 전쟁에서 사실상 체첸에 패배하면서 얼마나 허약해졌는지를 실제로 보여주었다. 

외교에서도 친미, 친서방 정책 위주로 일관하면서 러시아 국민의 반발을 샀다. 러시아의 첫 외교부 장관이었던 안드레이 코지레프는 러시아 외교의 4대 우선순위 과제 중 하나로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를 가진 서방 공동체로의 편입을 꼽았다. 

문수언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 ▲세르비아, 이라크, 리비아에 대한 유엔 제재 문제에서 서방에 끌려다닌 점 ▲2차 전략무기감축조약(START-II)의 감축 수준과 허용 규정에서 미국 무기 체계에 유리하게 양보한 점 ▲인도에 미사일 기술 판매를 금지하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점 ▲발틱 국가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인권 문제에 별다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점 ▲북방 4개 섬에 대한 문제에서 양보 의사를 표한 점 등을 거론하며 러시아가 미국에 일방적인 양보를 계속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에서 “러시아가 미국의 ‘열등한 동반자’ 관계를 탈피하고 러시아의 국가이익에 기반한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라고 설명했다. (문수언, 「러시아 外交政策 : 保守的 旋回의 加速化」(러시아 외교정책 : 보수적 선회의 가속화), 『지역경제』 1995년 9월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1995, 42쪽.)

옐친 대통령이 총리로 발탁하여 나중에 대통령까지 오른 푸틴 역시 초기에는 친미 저자세 외교를 하였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고 유럽연합, 나토와 긴밀한 협력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심지어 유럽연합, 나토 가입까지 언급하였다. 나토의 동진이나 미국의 ‘탄도탄 요격미사일 조약(ABM 조약)’ 폐기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발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의 집권 직후인 2000년 6월에 발표한 신대외정책개념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국 주도의 G8, 유럽연합 등과 긴밀한 협력을 하고 세계 경제로 편입하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양보하면 미국도 그만큼 양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러시아에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외교부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의 고재남 유럽·아프리카연구부장은 “미국이 러시아의 반대를 무시하면서 이라크전 수행, ABM 조약 일방 탈퇴와 MD[미사일 방어] 추진, NATO 확대, CIS 국가들의 시민혁명 지원과 친미 정권 수립, 코소보 사태 등 유고 내전 개입 등을 자행함에 따라서, 푸틴은 미국이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를 동등한 파트너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모멸감을 느꼈다”라고 설명했다. (고재남, 「탈냉전기 최악의 미·러 관계: 배경과 전망」, 『IFANS FOCUS』, 외교부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16.10.14.) 

마침내 푸틴 대통령은 대미 타협노선을 버리고 북한식 강경노선으로 갈아탔다. 

2008년 8월 8일 발발한 조지아 전쟁은 대미 강경노선의 상징적 사건이다. 

조지아 전쟁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일부였으며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지아는 나토 가입을 추진했으며 미국은 군사원조를 해주고 군사 고문단을 파견해 조지아군을 훈련했다. 장차 조지아에 미군 기지까지 건설할 구상도 있었다. 러시아 코앞에 미국 미사일이 배치될 상황이 된 것이다. 

예전 같으면 러시아가 항의만 하고 끝날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마침 조지아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남오세티야를 공격하자 러시아가 남오세티야 내 러시아인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조지아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8월 8일에 시작된 전쟁은 5일 만에 러시아의 압승으로 끝났다. 애초에 조지아는 군사력에서 러시아의 상대가 안 되었다. 또 러시아군이 1차 체첸 전쟁의 패배 후 와신상담(굴욕을 갚기 위해 온갖 괴로움을 무릅씀)하며 군 개혁을 진행한 것도 효과를 내었다. 

조지아는 당연히 미국, 나토, 유럽연합이 있으니 러시아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설사 전쟁이 나더라도 미국과 서방이 도와줄 거라 여기고 러시아를 도발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군대가 괴멸되었으며 영토의 20%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조지아는 아직도 나토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8월 8일은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있는 날이었다. 개막식장에서 푸틴 당시 러시아 총리는 부시 미 대통령에게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통보했다. 이 장면은 러시아가 대미 강경노선으로 전환했다는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에게 조지아 전쟁이 시작됐음을 통보하는 푸틴 총리.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도 마찬가지다. 

크림반도 합병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건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14년 2월 유로마이단 쿠데타로 우크라이나에 친미 과도정권이 들어섰다. 과도정부는 러시아어의 제2 공식어 지위를 박탈하겠다고 나서면서 러시아계 국민의 반발을 샀으며 특히 주민의 60%가 러시아계였던 크림반도 주민은 반정부 시위를 거세게 진행했다. 

크림 자치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정부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크림 자치공화국 총리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고 2014년 3월 1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서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상원에 요청해 승인받았다. 곧바로 러시아군이 크림반도에 투입되었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러시아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경고했다. 이후 과정은 전광석화처럼 흘러갔다. 

3월 16일 크림 자치공화국의 러시아 편입을 묻는 주민투표가 시작되었고 다음 날 97%의 압도적 찬성으로 끝났다. 18일 푸틴 대통령은 크림 공화국 귀속안을 의회에 통보했고 20일 러시아 상·하원은 크림 병합을 비준했다. 20일도 안 걸린 러시아의 속전속결 크림반도 병합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연합은 항의와 경고만 했을 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크라이나 해군본부가 크림반도에 있었기에 우크라이나 해군이 통째로 러시아에 넘어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미국은 대러 경제제재로 압박했으나 푸틴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경제 자립을 강화할 좋은 기회로 삼겠다며 미국을 조롱하였다. 푸틴 대통령은 2017년 9월 5일 중국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 참석한 후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핵문제에 대해 “현 상황에서는 그 어떤 (대북) 제재도 소용없고 비효율적”이라며 “북한은 풀을 뜯어 먹을지언정 제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함께 경제제재를 받는 처지에서 나온 이 말은 북한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다짐으로 평가되었다. 

중국의 사례도 살펴보자. 

1979년 미국과 중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수교한 것은 결코 사회주의를 인정하고 존중해서가 아니다. 미국은 중국에 자본주의 바람을 불어넣어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런 미국의 시도는 일정한 성과를 낳았다. 

2012년 3월 18일 새벽, 고가의 스포츠카인 페라리 한 대가 중국 베이징 시내를 질주하다 다리 난간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로 즉사한 운전자는 당시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최측근 링지화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의 아들 링구였다. 그리고 차에는 칭하이성 공안청 부청장의 딸과 라마교 지도자의 딸이 전라, 반라의 상태로 타고 있었다. 이 사건은 중국 지도부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중국은 지도부부터 부정부패로 썩어가고 있었다.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했던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는 재산을 엄청나게 빼돌리고 100명이 넘는 첩을 거느렸으며, 부인은 살인을 저질렀고 아들 보과과마저 사치 향락 생활을 했던 사실이 폭로되어 결국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지도부가 이 모양이니 미국과의 대결도 타협과 양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코소보 전쟁이 한창이던 1999년 5월 7일, 미군이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폭격해 중국인 3명과 세르비아인 1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오폭이라고 해명했고 중국은 고의적인 조준 폭격이라 주장하며 항의했다. 중국 내에서는 극렬한 반미 시위가 이어졌고 양국 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대사관은 다른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비엔나 협약에 따른 특별한 장소로 취급된다. 미군이 중국대사관을 폭격한 것은 중국 영토를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심각한 사건이다. 그런데 중국은 자국 대사관이 폭격당하고 자국민이 3명이나 죽었음에도 미국의 사과를 받고 2,800만 달러(약 308억 원)의 배상금을 받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수많은 중국인이 주중 미국대사관을 포위하고 거칠게 항의 시위를 한 것이 무색한 대응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시 중국 정부가 미군의 폭격이 오폭이 아닌 고의 조준 폭격임을 알면서도 사건을 무마했다는 점이다. 2011년 공개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미발간 회고록에 실린 비화에 따르면 당시 중국이 대사관 안에 세르비아 정보요원을 숨겨주었는데 이를 파악한 미군이 폭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항의하자 미국이 관련 증거를 제시했고 중국은 꼬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미국은 중국을 얕보았고, 중국은 미국에 길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데이비드 색스 미국외교협회 연구원은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과거 위기 때 중국은 미국과의 건설적 관계 유지에 가장 중요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라고 했다. 그는 1995~1996년 3차 대만해협 위기, 1999년 미군의 유고슬라비아 중국대사관 오폭, 2001년 중국 전투기와 미국 정찰기 충돌 등의 사례를 거론했다. (「펠로시의 대만 방문, 왜 “최악의 타이밍”일까」, 한겨레, 2022.8.2.)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2017년 4월 미중정상회담에서 중국은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 해소를 위한 합의를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은 미국산 쇠고기, 천연가스를 수입하고 미국의 금융 업체가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하였다. 일방적으로 미국에 양보한 것이다. 그해 11월에도 중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물품을 구입하기로 하는 등 2,500억 달러 규모의 미중 협약을 체결했다. 

이처럼 미국에 저자세였던 중국이 2018년 이후 대미 강경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2018년에는 사상 최초로 북미정상회담이 있었고 이를 전후로 3차례에 걸친 북중정상회담이 있었다. 중국의 대미 태도 변화는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마 북중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의 대미 강경 노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국 실정에 맞게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코노믹리뷰는 2019년 8월 26일 자 보도 「미중 무역전쟁 격화…애플 ‘새 국면’」에서 “현재 미중 무역전쟁은 난타전이다. 미국이 공격하면 중국이 즉각 대응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2019년 8월 24일 논평에서 “국가의 핵심 이익과 인민의 근본 이익을 지킨다는 중국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라며 “미국이 기어이 제로섬 게임을 택하면 중국은 끝까지 싸울 능력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중국 관영 환구시보도 사설에서 “중국이 이처럼 반격할 것이라고 미국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 “미국이 전력을 다해 압박을 가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상상 못 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전의 중국과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중국의 단호한 태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건 최근 있었던 낸시 펠로시 미연방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사태다. 중국은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강력히 규탄하며 전례 없는 대만 포위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에 대만 영해에 포탄이 떨어지고 대만 수도 상공에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충격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미국 내에서는 펠로시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중국이 대만을 압박할 명분만 쥐여줬다며 비판론이 거세게 일었다. 

8월 4일 대만 외교부는 중국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며 “중국이 지역적 긴장을 고조시킨 데에는 자국의 인근 해역에서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북한을 본보기로 따른 것”이라며 중국의 강경 행보에 북한의 영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대미 강경 노선에 미국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앞으로도 더 강경한 대미 외교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다. 자립경제


북한의 전통적 경제 노선은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이다. 북한은 이를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경제, 자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자기 나라의 자원과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발전하는 경제”라고 정의한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 항목)

북한은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에 따라 1962년 소련의 코메콘 가입 요구를 거절하였다. 코메콘(COMECON)이란 사회주의 국제 분업 체계를 말한다. 즉, 소련의 지휘 아래 사회주의 국가들이 특정 산업을 나눠서 발전시키자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개별 나라들의 산업은 기형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으며 경제적으로 소련에 의존하게 된다.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코메콘 가입을 강요했다. 북한은 내정간섭, 대국주의 경향이라며 소련을 비판하였다. (박아름, 「1962년 북한의 ‘사회주의 국제분업’ 이탈 분석」, 『역사문제연구』 25권 1호, 역사문제연구소, 2021, 448쪽.)

북한은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을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더욱 강화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6년 열린 7차 당대회에서 자강력제일주의를 항구적인 전략적 노선으로 정식화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자강력제일주의에 대해 “자체의 힘과 기술, 자원에 의거하여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고 자기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혁명정신”이라고 규정하였다. 

많은 나라들이 세계화 시대에 자립경제 노선은 시대에 뒤떨어진 노선, 비현실적인 노선, 비효율적인 노선으로 치부하였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사슬처럼 연결된 국제 공급망의 한계와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났고 세계화의 허상도 드러났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경제 위기의 비명을 지를 때 북한은 경제제재 속에서도 꾸준히 자립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또 북한의 자립경제는 미국과의 대결에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만약 북한의 경제의존도가 높았다면 미국의 대북 제재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지금도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중국에 기대를 걸고 있다. 북한 경제가 중국에 의존하고 있으니 북한이 중국 말은 듣지 않느냐는 논리다. 물론 이는 미국의 환상일 뿐이다. 북한은 철저한 자립경제를 건설했기 때문에 대미 강경 노선을 구사할 수 있다. 

북한의 자립경제 노선을 받아들인 러시아, 중국은 오늘날 미국과의 대결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은 사회주의 국제 분업 체계를 경제 노선으로 삼고 있었고 이 영향은 러시아로도 이어졌다. 대표적 사례로 농업 경시를 꼽을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취임 초 한 모임에서 러시아가 식량의 50% 이상을 수입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이후 푸틴 대통령은 식량안보 증진을 목표로 삼았다. (「산유국 러시아, ‘곡물 외교’ 시동 건다」, 내일신문, 2021.9.8.)

푸틴 대통령이 농업개발을 위한 국가 프로젝트를 본격 시작한 것은 2004년이다. 목표는 핵심 식량 자급률을 80~95%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2014년 대러 제재가 시작됐다. 러시아는 곡물 수입을 대부분 중단했다. 곡물 수입 중단은 자국 농업을 보호하는 효과를 준다. 이게 러시아 농업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2017년 러시아는 미국과 캐나다를 제치고 세계 밀 수출 1위 국가로 발돋움했다. 

식량안보라는 말도 있듯 식량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에 국가 안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만약 러시아가 지금도 식량의 50%를 수입하는 처지였다면 대러 제재에 이미 굴복했을지 모른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3월 10일 국무회의에서 “어차피 서방의 러시아 경제 제재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라며 “현재 상황은 결국 러시아의 독립과 자급자족, 주권의 신장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러시아는 경제뿐 아니라 군사기술에서도 독자화를 이루었다. 외부의 무기 지원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러시아는 나토 전체와 전쟁해도 이길 만큼 많은 무기와 첨단 무기, 그리고 현대적인 군대 편제와 작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왜 나토군을 ‘종이호랑이’로 여길까」, 서울신문, 2022.1.23.)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중국도 자립경제 건설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세계의 공장 노릇을 하며 수출 중심, 제조업 위주의 경제체제를 발전시켜왔으나 앞으로는 내수시장을 성장 동력으로 전환하고 경제안보를 강조하겠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경제기조는 내수가 성장을 주도하고 수출이 보조하는 ‘쌍순환’, 핵심 산업의 기술 자립을 통해 외부 의존도를 낮추는 ‘혁신주도형 발전’ 두 축으로 가는 것이다. 이는 2020년에 발표한 ‘중국 14차 5개년 규획’에 따른 것이다. (「“中, 앞으로 5년 ‘자립형 경제’로 간다”」, 조선비즈, 2021.5.20.) 

특히 중국은 미국의 제재에 맞서 기술 자립에 집중하여 투자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2020년 6월 24일 발표한 「첨단기술을 둘러싼 미·중 간 패권 경쟁 분석」에서 “2014년 후반 이후 중국의 기술혁신 생산성은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고 밝히면서 특히 5G, 슈퍼컴퓨터,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중국은 미국과 수위를 다투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중국의 노력이 미중 무역전쟁에서 중국의 승리를 이끈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 교수는 미국·유럽 대 중국·러시아의 경제 전쟁은 중러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식량과 에너지 등 핵심 자원의 자급자족 능력에서 중러가 훨씬 앞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화는 끝났다. 미래의 승자는 중국/러시아다”」, 프레시안, 2022.4.3.) 자립경제 노선이 국제 질서에 어떤 변화를 낳을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계속)


김민준 주권연구소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