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10월 06일
기사 제목 : 국가보안법의 실행자들이 통제하는 ‘2021 빨갱이 게임’
'내 머릿속' 국가보안법과 실행자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20여 년 전인 1988년 8월 4일, MBC <뉴스데스크> 방송에 불쑥 등장한 남성이 이렇게 말했다. 남성은 끌려나가면서도 “저는 가리봉1동에 사는 소창영이라고 합니다”라고 끝까지 외쳤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가장 황당한 방송사고로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다.
위 사례는 언뜻 흔치 않은 돌발사고 같지만, 한국이 감시가 만연한 감시사회임은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생각을 언제 어느 때든지 감시하고 통제하는 무시무시한 악법, 자기검열-상호검열의 사령탑이 있기 때문이다. 사령탑의 이름은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우리 머릿속에 들어앉은 이 사령탑은 틈날 때마다 삐뽀삐뽀 위험 신호를 울려댄다. ‘너 말이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종북 빨갱이로 몰릴 수 있어.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말해라. 항상 조심 좀 하고’라고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레드콤플렉스라고 얘기하는 건 색깔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증이에요. 즉 간첩이나 종북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죠.”
김태형 심리학자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국가보안법의 실행자들>에서 위와 같이 강조한다. 국가보안법이 간첩이나 종북으로 몰릴 수 있는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법만으로는 저절로 공포가 생겨나지 않는다. 법을 뒷받침하고 구체화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 뒷받침과 행동을 맡은 이들이 국가보안법의 실행자들이다. 국정원 직원, 기무사 직원, 정보 경찰 등이 장본인이다. 실행자들은 국가보안법을 무기 삼아 간첩 조작, 압수수색, 감금, 고문을 벌여왔다.
<실행자들>은 그동안 잘 조명되지 않은 공안기관의 실체에 몇 발짝 다가서게 도와준다. 영화는 시작부터 이명박 정권 당시 국정원이 국민 천 명을 사찰한 ‘국가정체성 훼손’ 보고서를 비춘다. 국정원은 종북, 빨갱이로 낙인찍은 사찰 대상의 휴대전화에 스파이앱을 설치, 일상과 대화를 낱낱이 들여다봤다. 이래서야 우리의 처지는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친 소창영 씨와 그리 다를 게 없는 수준이다.
또한 영화는 실행자들을 국가보안법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력으로 규정한다. 실행자들에게는 더 많은 사람을 종북과 빨갱이로 몰수록 승진과 목돈이라는 보상이 뒤따른다. 그런 점에서 국가보안법과 국가보안법의 실행자들은 서로의 생존을 돕는 공생관계라는 것이다.
국정원, 기무사, 정보경찰…실행자들의 뿌리
“일제가 잉태하고 이승만이 키웠으며 박정희가 완성한 극우 공안체제 정보기관의 극우적 성격은 변할 수 없는 유전자로 뿌리박힌 것입니다”
“우리 분단과 함께 온 해방의 최대 수혜자는 친일파예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지만 일본놈들 쫓아다니면서 그놈들이 흘린 떡고물 주워 먹었는데 미국은 들어와서 떡판을 맡겼습니다.”
영화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풍경을 이렇게 진단한다. 그러면서 “독립군 사냥으로 악명 높던 친일파들이 국가보안법을 등에 업고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라고 밝힌다.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 출범 5년째로 접어드는 오늘도 마찬가지다. 촛불 시민들의 하나 된 힘으로 박근혜가 몰락하고 정권이 바뀌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을 휘둘러온 공안기관, 실행자들의 횡포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친일에서 친미로 갈아탄 이승만 정권의 특무대는 보안사, 기무사, 국군정보지원사령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중앙정보부 역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간판과 이름이 달라졌을 뿐 역할은 바뀌지 않았다. 실행자들은 언제나 국민이 아니라 적폐세력의 편이다. “정보기관은 보수세력이 집권하면 충성을 다했지만 민주세력이 집권하면 태도를 바꿨다”라는 영화의 설명처럼 말이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기무사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과 통화하는 내용을 감청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속보를 본 기무사 요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19대 대선 기간 동안 기무사는 문재인, 안철수 후보를 표적으로 한 내부 동향 보고서를 작성했고 시시때때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지난 2017년 촛불혁명 당시 기무사는 광화문광장을 장갑차로 둘러싸는 계엄령을 발동하려 했다. 촛불혁명을 뒤엎으려는 쿠데타를 꾸민 것이다. 다행히 쿠데타는 실행되지 못했고 정권이 바뀌었다. 하지만 쿠데타와 깊숙이 연관된 기무사 간부들은 사표를 내며 퇴직 시늉을 내고는, 국군지원사령부에 군무원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재취업’했다. 그렇다면 처벌과 재판을 받은 실행자들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다.
국내 정보 수집 부서를 폐지하고 해외 정보 수집에 전력하겠다던 국정원 역시 간첩 조작 사건을 벌이고 있다. 남북경협사업가 김호 씨가 난데없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대표 사례다. 김호 씨가 늘 국정원과 소통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을 조심했다는 점에서, 국정원이 무리한 간첩 조작 사건을 벌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5월에도 국가보안법 10만 청원 통과 이후 석연찮은 간첩 사건이 터졌다. 4.27시대 연구위원 구속 사건, 충북 동지회 사건, <세기와 더불어>를 펴낸 출판사 민족사랑방 압수수색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이런 흐름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고자 국가보안법을 악용하는 실행자들의 대국민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직접 마주한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극우세력에 의해 국가변란, 잠입탈출, 목적수행, 찬양고무 혐의로 고발됐다. 공안기관은 해당 고발 건을 묵히고 있다. 하지만 정권이 국힘당에 넘어가게 된다면, 국정원은 섬뜩하게 돌변해서 문재인 대통령의 목줄을 조이려 들 것이다.
당장 20대 대선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현재를 돌아보자. 박근혜 대신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공안기관의 보고를 받은 황교안이 멀쩡히 국힘당 경선 후보로 나온 실상이다.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실행자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고민에 이르게 된다.
국가보안법 폐지로 빨갱이 게임 끝내야
결국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실행자들이 기획한 빨갱이 게임에 내몰린 사냥감인지도 모른다. “특정 몇몇이 아니라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영화 속 대사에 정신이 번쩍 드는 이유다.
<실행자들>에는 재일동포 김병진 선생의 사연이 나온다. 전두환 정권 당시 서울에서 박사 과정으로 유학하던 김병진 선생은 보안사의 고문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쳤지만, 4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김병진 선생은 일본 부모님 댁으로까지 찾아오는 보안사 요원들을 피해 숨죽여 살아왔다. 보안사 요원들이 찾아오지 않는 지금도 김병진 선생의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최근 국가보안법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있다. 대전에 있는 제32보병사단에서는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1일까지 통합방위훈련을 벌였다. 사단에서는 최대 20억 원 포상을 내걸며 “거동수상자 발견 시 적극 신고”를 당부했다. 한마디로 군 당국에서 철 지난 간첩 신고를 부추긴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간첩으로 의심케 만드는 박정희-전두환식 종북몰이 수법이다. 실행자들의 인식이 얼마나 국민과 동떨어져 있는지 드러나는 장면이다.
다만 이런 부조리를 청산할 방법이 있다. 모두가 힘을 합쳐 국가보안법을 없애 버리면 된다. 국가보안법을 없애면 실행자들과 기획자들이 국민을 종북으로 몰아대는 빨갱이 게임을 완전히 끝낼 수 있다.
마침 게임 종료를 위한 환경과 조건도 갖춰졌다. 진보민주개혁진영의 국회 의석수는 180석을 넘나든다. 국가보안법 폐지 여론도 곳곳에서 힘을 받고 있다. 힘껏 용기를 내야 한다. 결정적 시기에 주춤하고 머뭇댈수록 실행자들의 몸부림도 강해지는 법이다.
“공안조직이 가장 절박한 겁니다. 그들의 절박함을 우리가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국가보안법의 피해자 김호 씨는 이렇게 강조한다. 실행자들이 자신의 ‘밥줄’인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막으려 사활을 걸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9월 30일에는 앞장서서 국가보안법 7조 폐지법안을 발의한 이규민 의원이 석연찮은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의원직 박탈 사유는 허위사실 공포로 1심에선 무죄를 받았던 사안이었다. 그래서 과연 이것이 의원직을 박탈당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냐는 얘기가 나온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방해하고 나선 실행자들의 촉수가 뻗친 결과가 아니냐는 의심이 떠나질 않는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적용된 치안유지법에서 비롯된 빨갱이 게임, 그 역사는 벌써 100년에 가깝다. 이 역사를 끝내자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폐지를 위해서는 물러섬없이 국가보안법을 없애고 말겠다는 절박함이 무척 중요하다. 국가보안법과 실행자들을 떠받치는 수구적폐세력과 끝까지 싸워 이기겠다는 절박함 말이다.
이럴 때야말로 국가보안법 폐지가 답이다. 국가보안법을 없애면 잠재적 피의자로서 살아오던 우리가 이 땅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길도 열린다. 아울러 분단과 대립을 넘어 통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설계하는 실행자, 기획자로도 우뚝 설 수 있다. <실행자들>이 던지는 강력한 교훈이다.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