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3.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 일부가 나옵니다. 독자분들께서는 읽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맞닥뜨린 남과 북

 

 

최근 화제를 뿌리고 있는 <모가디슈>1991년에 있었던 소말리아 내전을 주제로 다룬 영화다. <모가디슈>는 이렇게 시작한다.

 

카메라는 첫 장면부터 땡볕이 내리쬐는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를 비춘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큼직한 가방을 들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이 가방은 국제법에 따라 외교관의 동의 없이 개봉이 금지된 외교행낭이다. 외교행낭에는 소말리아가 북한이 아닌, 한국의 UN 가입에 힘을 실어주길 바라며 바레 대통령에게 전하는 어떤 선물이 담겼다. 이 선물을 계기로 소말리아의 남북 대사관이 충돌하게 되면서 영화가 본격 전개된다. (이 선물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는 강력한 내용 발설이 되므로 이 글에서는 밝히지 않는다.)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에서 실화와 각색을 노련하게 버무렸다. 이건 관객의 시선에서 보자면 영화를 통한 체험에 가깝다. 감독은 모가디슈 내전이라는 실제 역사와 시대 배경을 바탕으로 남북의 만남과 엇갈림을 생생하게 체험케 한다.

 

이전에 소말리아 내전을 다룬 영화들은 주로 초강대국인 미국의 시선을 조명했다. 이를테면 미군이나 미국인이 소말리아 반정부군, 해적과 맞서는 장면을 그렸다. 이런 장면은 2002년 작 <블랙호크다운>, 2013년 작 <캡틴 필립스>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뚜렷하게 묘사돼 있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소말리아의 폭동을 억누르는 영웅으로서, 미국의 힘을 과시해왔다.

 

그런데 같은 소말리아를 다뤘지만 <모가디슈>가 뻗어 나가는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남과 북이 한데 모인 우리 민족은 모가디슈 한복판 총기가 난사되는 대혼란 속에서 함께 살기 위해 뭉친다. 이 과정에서 분단과 이념, 체제, 말투 따위는 그다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불안 속 처음에는 떨떠름하게 맞닥뜨린남과 북의 사람들은 어느새 진심으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어색한 분위기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하다가 젓가락으로 깻잎 한 장을 골라주는 식이다. 이런 장면을 쭉 보면 누구나 깻잎(종이) 한 장도 맞들면 낫다’, ‘남북도 하나로 맞들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리라.

 

영화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눈을 부릅뜨고 2시간 가까이 집중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공들여 연출한 장면 하나하나 인물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마다 분명한 의미와 의도가 깔려있다. 특히 남북 분단의 역사와 소말리아에서 왜 내전과 폭동이 일어나게 됐는지 시대 배경을 미리 알고 있다면 영화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느끼기 좋다.

 

 

이탈리아 대사관은 왜 안전했을까?

 

 

“이탈리아가 예전에 소말리아를 신탁통치했고 지금도 소말리아에 영향력이 있다. 이태리 대사관이 가장 안전한 곳이다.”

 

 

위는 과거 소말리아를 식민지배했던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영화 속 중요한 대사다.

 

남과 북의 사람들은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정부군이 난사하는 총부리를 뚫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한다.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정부군은 이탈리아 대사관은 이탈리아의 영토라며 총구에서 불을 뿜는 이탈리아 대사관의 호령에 더 이상 접근하지 않는다.

 

언뜻 이 장면만 본다면 이탈리아가 소말리아의 안전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우리 민족이 이탈리아의 덕을 봤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소말리아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이탈리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소말리아 반도는 인도양과 대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고 이 지역 주민들은 활발한 교역을 통해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제국주의 열강인 영국과 이탈리아가 소말리아를 침탈해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백인에게 충성하는 흑인들과 그렇지 않은 흑인들을 나눠 소말리아를 지배했다. 영화 속 정부군과 반정부군으로 나뉘어 폭동이 벌어지는 소말리아의 모습도 결국 이러한 구도에서 대물림된 것이다. 영화는 소말리아가 독립한 뒤에도 제국주의 열강과 식민지 피해주민 사이의 상하관계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극적으로 주시한다.

 

지난 20세기 한반도가 일제의 침탈로 식민지가 된 역사를 떠올리면,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탈출하는 장면은 허투루 지나치기 어렵다. ‘어째서 소말리아 주민들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데 이탈리아 대사관만큼은 안전할까?’라는 고민에 사로잡히게 된다. 관객은 소말리아와 마찬가지로 한반도가 아직 전쟁상황임을 떠올리게 된다.

 

분명히 자각해야 할 건, 오늘날의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휴전상태이고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우리에게는 늘 전쟁과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영화는 이런 점에서 소말리아 반도와 한반도의 처지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비춘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이외에 다른 강국들은 어땠을까? 영화에서 또 다른 강국으로 언급되는 미국은 진작 대사관이 발을 뺐다는 소식만 잠깐 나온다. 최근 실제 현실에서 미국이 부리나케 아프가니스탄에서 야반도주했는데,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미국은 온데간데없었다. 소말리아에서는 미국을 대신해 이탈리아의 국기가 펄럭일 뿐이었다.

 

이 역시 소말리아 반도와 한반도의 상황을 교차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평화는 결국 남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것, 외세의 개입은 혼란을 불러올 뿐이다.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과 분단체제

 

 

<모가디슈>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특징은 북녘 사람들이 하는 대사마다 일일이 자막이 달려있다는 점이다. 사실, 자막이 없어도 북녘 사람들의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 남과 북의 사람들은 억양과 말투가 그저 아주 조금 다를 뿐이다. 그런데도 감독은 북녘 사람들의 대사마다 굳이 일부러 자막을 넣었다.

 

이 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는 실감하게 된다. 남북이 휴전상태로 분단돼있음을,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음을 말이다. 이것은 감독이 전쟁과 대결을 직접 겪지 않은 우리를 위해 마련한 장치로 보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남과 북이 갈라져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된다.

 

그렇게 체험을 이어가다 보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장면과 대사들이 여럿 있다.

 

 

“이거 국가보안법 위반이에요!”

 

 

“함께 살 수 있다면 뭐라도 해 봐야지!”

 

 

위는 극과 극을 상징하는 대사다. 남측의 한신성 대사는 북녘 사람들과 함께 모가디슈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안기부 소속인 강대진 참사관은 이거 국가보안법 위반이에요!”라고 외친다. 그 말에 한신성 대사는 다시 함께 살 수 있다면 뭐라도 해 봐야지!”라고 답한다. 북녘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이 순식간에 무력화된 명장면이다.

 

영화의 배경인 1991년은 냉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이었고,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사람들을 향해 전향 공작을 시도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소말리아라는 외교무대상 깡촌에 들어온 이상, 북녘 사람들을 한국에 전향시켜 출세를 꿈꾸는 참사관의 모습도 눈에 띈다. 처음에 남측 대사관에서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받아들였던 건 그런 의도였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 있게 되고, 함께 사선을 넘으면서 서로를 향해 쌓인 해묵은 앙금과 오해 섞인 감정들이 풀리게 된다. 그렇게 남녘 사람들은 전향과 공작의 대상인 빨갱이로 생각하던 북녘 사람들을 서서히 같은 인간으로서 동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남측 대사관에서 해코지할까 봐 굳어있던 북녘 사람들의 표정도 점차 환하게 핀다.

 

다만 영화가 내리는 결론은 실화와는 퍽 다르다. 실제로는 남과 북의 대사관 사람들이 포옹하며 밝게 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지 않다. 아주 살짝만 언급하자면, 새까만 선글라스를 쓴 안기부 요원들이 난입해 빨갱이들 어디 있어!”라고 외친다.

 

그 순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엄청난 긴장감이 몰려온다. 남북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남았다고 기뻐한 건 아주 잠시뿐, 곧바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 비극이 펼쳐진다. 국가보안법과 분단이 없었다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정이 든 하나의 동포들이 흩어질 일은 결코 없었으리라.

 

따라서 영화가 전하는 교훈은 분명하다. 숨 막히는 국가보안법과 분단상황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또 대결을 넘어 우리 민족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평화와 번영, 통일을 이루기 위한 최우선 조건은 함께 행동하고 실천하는 우리라고 전하는 듯하다.

 

 

한반도의 손익분기점 그리고 평화와 번영, 통일

 

 

<모가디슈>의 손익분기점이 관객 수 600만 명이라고 한다. 이런 좋은 영화가 코로나19 때문에 손익분기점을 넘기 힘들겠다는 지레짐작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 91일 기준 <모가디슈>가 어느덧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영화업계에서 제작비 50%가 회수될 때까지 극장 영화표 값 전액을 영화배급사로 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두가 힘든데 더 힘든 이를 향해 베푼 사랑의 덕이라고나 할까.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현실에도 손익분기점이 있지 않을까? 분단과 전쟁위기, 대결이 손해라면 당연히 평화와 번영, 통일이 이익일 것이다. 2018년 당시 평창올림픽과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부터 2021년의 남북 통신선 연결과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따른 통신선 연결 재중단까지, 한반도는 3년을 넘게 평화와 위기 사이를 오락가락해왔다.

 

남북관계가 다시 멈춰선 지금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일은 만만찮아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한신성 대사가 외친 함께 살 수 있다면 뭐라도 해봐야지!”가 근본 해답이 아닐까. 영화 속 남과 북은 함께 살아남기 위해 체제, 이념, 국가보안법까지 벗어던졌다. 하지만 실제 현실을 보면 남측에서는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합의 이행도 지지부진하다. 지난 5월 매우 빠른 속도로 국회 청원 동의 10만 명을 넘긴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안도 감감무소식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20년 전 모가디슈에 멈춰 있을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앞으로 진보해야 한다.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사람 저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런 만큼 많은 분께서 <모가디슈>를 보시면 좋겠다. 남과 북이 생사를 넘나들며 함께하는 순간 순간을 직접 체험하시길 추천해 드린다.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