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6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전쟁 중 수행된 친일청산과 토지개혁
*한국전쟁을 두고 남북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본 자료와 내용은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며 NK투데이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2) 남한에서의 변화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남 전역에서 이승만 정부의 통치력이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1945년 건설되었던 인민위원회가 재건되기 시작했다.
(문) 전쟁 나고 인민군이 들어와서 인민위원회를 만들었죠?
(답) 아니죠. 인민군 들어오기 전에 벌써 조직적으로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그랬죠.
(문) 인민군들 들어오기 전에 자체적으로요?
(답) 그렇죠. 그러다가 그냥 흐지부지 그만둔 거지 뭐. 인민위원장이고 뭐고, 누가 그때 뭐. 인민위원장이고 뭐고, 누가 그때 뭐. …민청(민주청년동맹) 책임자는 누구다 이렇게 해놓고…
– 경기도 이천군 오두리에서 한국전쟁을 겪었던 한 인물(김철환, 1921년생)의 증언.
남한에 진주한 북한군 역시 인민위원회 건설을 추동했다.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진주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던 4천명 이상의 정치범을 석방시킨 것이었다.
이들은 4.3항쟁을 비롯해 분단반대 투쟁에 나섰던 인물들로 출옥 후 지역 곳곳에서 인민위원회를 부활시키고 민청, 여성동맹, 농민회, 소년단 등을 이끌었다.
북한군 진주 직후 복구된 서울시 인민위원회의 경우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은 모두 이남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로 몰아 투옥시켰던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이었다.
북한군은 부활된 인민위원회가 지역 자치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따라서 인민위원회에 대한 주민들의 지지를 모우기 위해 인민위원회 대표 선거를 시행할 것을 발표한다.
7월 14일 발표된 ‘공화국 남반부 해방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정령’에 따라 1950년 7월 25일부터 9월 13일까지 지역 8개 도의 103개 군, 1,186개 면, 1만 3,654개 리(동)에서 선거가 시행되었다.
친일파 등을 제외한 만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성별·민족별·신앙·재산 등을 불문하고 투표권을 보장받았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이남지역 대표자들은 군 인민위원 3,878명, 면 인민위원 22,314명, 리 인민위원 77,716명까지 총 103,908명이었다.
위원 중 노동자·농민 출신은 90%에 달했다고 한다.
인민위원회의 주도로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노동법령의 시행, 친일청산 등 북한 지역에 시행된 ‘민주개혁’이 추진되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북한 정부는 1950년 7월 4일 남한 토지개혁 법령을 발표한다.
‘무상몰수·무상분배’의 원칙 실현과 ‘소작제도를 영원히 폐지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법령에 따라 각 지역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소작농,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로 농촌위원회가 꾸려졌다.
1950년 9월 발표에 따르면, 남한에서 총 1만 8천여 개의 농촌위원회가 꾸려졌으며 총 14만 명의 지역 농민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문) 인민군 점령 시기에 토지개혁을 안 했나요?
(답) 토지개혁이요? 토지개혁은 인민군이 한 게 아니고 인민위원회에서 했어. 거기서 해가지고, 자기 하는 땅을 누구누굴 저거 하고, 땅 없는 사람은 좀 주고 그랬었지.
(문) 이 마을에서 그런 걸 했나요?
(답) 했죠. 여기서도.
(문) 토지개혁할 때 토지개혁위원회 같은 걸 별도로 만들었나요?
(답) 그럼 만들었지. …마을에서 누구누구를 선출을 했지. 제일 연소자로 내가 거기 위원으로 있었다고.…무상몰수 무상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무상몰수 당하는 사람들이, 첫째 악질 사음(마름), 또 전부터 땅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 땅부터 몰수를 한거지. 뺏어서, 가령 오두리 하면 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몇 마지기씩 노나준 거지. 그렇지만 노나줘서 농사를 져봤나? 말로만 그런 거지….무상몰수 무상분배해서 실제 농사를 지어봤어야 어쩌구 하는 건데. 실제 그렇게 농사를 못 지었으니. 다만 악질 사음이 땅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그 사람 땅을 뺏어서 식구 비례, 노력 비례로 공평하게 나눠주자고 한 게 공산당이 한거야.
– 경기도 이천군 오두리에서 한국전쟁을 겪었던 한 인물(김철환, 1921년생)의 증언.
토지개혁은 서울시,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중, 전남, 경남, 경북을 제외한 모든 시·도에서는 완전히 시행되었다.
김철환 씨의 주장에 따르면 토지개혁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몰수와 분배가 이루어지는 예민한 문제였기 때문에 실무과정은 농촌위원회가 담당했지만 최종 결정은 호별로 한 명씩 참가하는 마을 회의에서 내렸다고 한다.
전남, 경남, 경북 지역의 경우 북한군이 점령한 지구의 군·면에서만 진행되었다고 한다.
전남 252개 면 중 208개 면, 경북 251개 면 중 107개 면, 경남의 239개 면 중 99개 면으로 각각 82.5%, 42.5%, 41.4%에 달했다.
이렇게 해서 남한 전체 1,526개 면 중 1,198개 면이 토지개혁을 했는데, 이는 비율로 전체 남한 경지면적의 78%에 해당했다.
토지개혁으로 몰수된 토지는 총 59만 6,202정보이고 분배된 토지는 57만 3,334정보이며 나머지 2만 2,800여 정보는 국유화되었다.
무상몰수 대상이 된 토지에는 미국 소유지는 975정보, 이승만 정부 소유지 3만 9,627정보, 회사 소유지 1만 993정보, 지주 소유지 52만 4,491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몰수된 토지는 주로 농업노동자, 소작농, 영세농 총 126만 7,809호에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이는 이남 농가의 66%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한 북한은 1946년 시행된 노동법령을 1950년 8월 18일 ‘공화국 내각 결정 제149호를 통해 남한 전역에서 적용시켰다.
북한 노동자, 사무원들에게 적용된 임금 액수가 그대로 남한에도 적용되었다.
심지어 북한 당국은 전쟁을 겪은 남한 노동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임금의 8배를 우선 지불해주기까지 했다.
1950년 7월 9일에 통과된 세금제로 인해 이승만 정부 당시 시행되었던 공출제, 지세 등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세금을 현물(생산된 농작물)로 낼 수 있도록 했다.
북한은 각 지역 인민위원회가 주도한 친일파 등 민족반역자 재판을 지원했다.
재판은 이남 출신 인사들이 진행했다.
서울의 경우 서울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원세훈에 의해 주관되었다고 한다.
전쟁 후 인민위원회 부활과 북한군의 지원으로 급격한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남한에서는 전쟁이 개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동안 40만 명의 청년학생들이 ‘의용군’(북한군)에 탄원했다.
한편 북한은 미군철수를 위한 전민족적인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미 CIA는 서울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대거 북한군에 입대하였다고 보고하면서 ‘북한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과거 이승만 정권이 얼마나 남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못받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북한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바라보고 조국통일민주주의위원회 명의로 8월 14일 ‘조선 인민의 성명서와 그 서명운동에 대하여’를 발표하도록 했다.
“미국의 무력간섭을 즉각 중지시키고 외국 간섭자의 군대를 조선으로부터 철수시킬 방안을 강구할 것을 요구하고, 조선에서 동족상잔의 내전을 도발하고 조선 인민에 대한 무력 간섭자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이승만을 인민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한 조선인민의 성명서에 서명할 것을 전 인민에게 호소한다.”
– 성명서 일부
그로부터 보름 뒤인 8월 29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서명운동 결과를 총괄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및 유엔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발송했다.
1.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의해서 1950년 8월 15일 ~ 27일까지 실시한 ‘조선 인민의 성명서’에 15세 이상의 조선 인민 중 13,319,102명이 서명했다.
2. 이 서명에 표시된 압도적 다수의 조선 인민의 의지를 중시하고 유엔은 그 헌장에 입각해서 조선에 대한 미국의 무력간섭을 즉각 중지하고 조선으로부터 외국 군대를 철거시킬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서한에 따르면 총 1,300만 여명이 서명에 동참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당시 전체 민족 3천만 중 절반에 달하는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