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6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북한은 어떻게 1달 만에 낙동강까지 내려왔을까?
* 한국전쟁을 두고 남북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본 자료와 내용은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며 NK투데이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전쟁의 전개
1) 북한의 ‘반공격’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군이 38선 전역으로 침공을 개시해 해주, 금천, 철원 일대에서 북한지역으로 1~2킬로미터 쳐들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그 후 어떻게 대응했을까?
김일성 수상은 6월 25일 전쟁 직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와 내각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를 통해 인민군과 경비대가 적들의 진공을 저지시키고 즉시 결정적인 ‘공격’으로 넘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북한은 이때의 전술을 ‘반공격’이라고 칭한다.
반공격전술은 적들이 공격을 했을 때 단순히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반공격’을 펼쳐 전쟁에서 승리하는 전술을 일컫는다.
북한은 ‘반공격 전술’이 세계전쟁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반공격’을 한 걸까?
전쟁 다음날인 6월 26일, 김일성 수상은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방송 연설을 진행했다.
연설에서 김일성 수상은 “우리 조국의 전체 애국적인민은 평화적 방법으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매국역도는 인민을 반대하여 동족상쟁의 내란을 도발하였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역도는 동족살륙전쟁을 통하여 남반부에서 지배하고 있는 반인민적인 반동통치제도를 공화국북반부에서까지 실시하려 하며 우리 인민이 쟁취한 민주개혁의 성과들을 빼앗으려고 합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역도는 우리 조국을 미제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며 전체 조선인민을 미제의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전체 조선인민은 또 다시 외래제국주의자들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거든 이승만매국정권과 그 군대를 타도분쇄하기 위한 구국투쟁에 다같이 일어나야 합니다.”고 주장했다.
요약하면, 이승만 정부가 지금까지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조국전선의 제의 등을 무시하면서 분단을 고착화시켰고 지금은 ‘내란’을 도발해 북한 지역을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김일성 수상은 연설에서 “조선인민은 이승만도당을 반대하는 이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 헌법을 사수하여야 하며 남반부에 수립된 매국적괴뢰정권을 소탕하고 우리 조국 남반부를 이승만역도의 반동통치에서 해방하며 남반부에 진정한 인민정권인 인민위원회들을 부활시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치 밑에 조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을 “이승만 매국정권이 일으킨 내란에 반대하여 우리가 진행하는 전쟁은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정의의 전쟁입니다.”이라고 정의했다.
결국 북한은 ‘이승만 친미 정부의 도발을 막아내고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켜 통일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북한은 단순히 방어만을 하지 않고 ‘반공격’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반공격의 목표는 “적의 무력침공을 좌절시키고 신속히 반공격으로 넘어가 미국이 대병력을 증강하기 전에 높은 기동력과 연속적인 타격으로 적의 기본 집단을 짧은 시일 안에 격멸소탕하고 남한 ‘인민들을 해방’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즉 미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한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빠르게 남한 전역을 ‘해방시키는 것’이 북한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높은 기동성과 연속적인 타격’을 전투 진행의 기본 요구로 내세웠고 급속도로 남하했다.
실제 25일 오전에 동두천, 25일 저녁 포천, 26일 오후 의정부, 28일에는 서울까지 내려왔다.
거의 1달 만에 낙동강까지 내려오면서 북한의 ‘반공격’이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에 거의 근접했다.
그 비결을 북한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북한 측은 이것이 북한군의 정신력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초기 ‘이승만 정부의 침략을 막아낸 것’부터 ‘용감한 공화국경비대’ 덕분이라는 것이다.
※ 김일성 수상의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방송연설에는 “용감한 공화국경비대는 적들의 침공에 항거하여 가열한 전투를 전개하면서 이승만군대의 진공을 좌절시켰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면 실제 전투 과정은 어땠을까?
북한이 처음 미군과 조우한 것은 7월 5일 오산이었다.
북한군은 오산계선에 진을 치고 있던 미군 보병과 포병 두 개 대대와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이루었다.
당시 미군이 도망칠 때 중상자는 성조기를 덮어두고 경상자만 데리고 나올 수 있었으며 패잔병들은 공포에 질려 철갑모, 웃옷, 신발까지 벗어 던지고 도망쳤다.
- “조선전쟁”, 쥬오고론샤, 1967
대전에서도 북한군이 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북한군은 하룻밤 사이에 50km 산길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우회 기동전술을 사용해 대전-금산간 도로, 대전-대구간 도로를 차단하고 대전 서쪽까지 진출했으며 동남쪽, 북쪽까지 완전히 포위하게 된다.
- 조성오, "우리역사이야기 3", 돌배게, 1993, 94쪽.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완전히 고립된 미군들을 괴멸시켰고, 미군 제 24사가 완전히 붕괴되자 사단장 딘은 전사복을 입고 도망치다가 생포되었다.
딘의 체포는 미국 역사상 사단장이 외국군에 잡힌 첫 번째 사례였다.
북한이 파죽지세로 내려올 수 있었던 데는 발 빠르게 전시체제로 개편한 것도 한 몫 했다고 주장한다.
북한에서는 곧바로 모든 국가기업이 군수품 생산공장으로 전환되었고 중요한 공장과 기업들은 안전한 지대로 분산되었으며 식량생산을 늘리기 위한 대책이 취해졌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 개시 후 불과 수 주일동안 84만 9,000여명의 청년학생들이 전선출동을 탄원하여 나섰으며 노동자들은 노동자연대를 조직해 전선으로 나갔다고 한다.
전선으로 나가지 못한 노동자들은 군수물자를 보급․운반하기 위한 사업에 적극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북한은 전쟁이 개시된 지 1달 만에 포항-대구-마산까지 진주해 남한의 90% 이상에 달하는 넓은 지역 차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남한 인구 중 92% 이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 된다.
참고)
미국은 어떻게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하게 되었을까?
-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99~202쪽.
미국의 요청으로 25일 오후 2시(미국 시각, 한국 시간 26일 오전 4시) 유엔안보리 긴급 회의가 소집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참석 문제를 놓고 소련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급하게 열린 이 회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회의로서 효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은 주한 미 대사 무쵸의 보고를 유일한 법적 근거로 해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면서 북한군의 38도선으로의 철퇴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시켰다.
7월 7일 미국의 요청에 의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엔 회원국의 군대를 미국 정부 하에 두기로 했다.
세계 16개국의 군으로 구성된 유엔군에서 공군의 98% 이상,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를 미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트루만 미 대통령은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유엔의 개입 결정이 있기 전부터 이미 한반도에 해군과 공군을 투입시키고 6월 29일부터는 38선을 넘어 북한지역에 대한 폭격을 시작한 상태였다.
6월 27일 오전 11시(미국 시간 26일 오후 9시) 백악관 제2차 안보회의에서 해공군의 참전을 결정하고 이 같은 사실을 트루먼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6월 30일 오전 5시(미국시간 6월 29일 오후 3시) 트루먼 대통령은 지상군 투입까지 승인했다.
-최용호·김병륜 공저, “그때그날”, 삼우사, 2003년, 43쪽.
이미 6월 26일 밤 10시(미국 시간) 맥아더 극동사령관에게 ‘맥아더 사령관은 즉시 한국에 출동하라’는 내용의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미국은 유엔군이 꾸려지기 전 이미 사전에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