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6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6월 25일 전쟁 발발
* 한국전쟁을 두고 남북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본 자료와 내용은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며 NK투데이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68년 동안 한국전쟁 발발 주체에 대해 남북 간 입장 차는 극명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침략으로 바라보고 수백만 민족 구성원이 죽어간 책임을 북에게 돌려 반북·반공 이데올로기를 유포해왔다.
반면 북한은 한국전쟁 발발 주체를 “미제와 이승만정부”라고 주장해오면서 반미의식을 고취해왔다.
“미제와 이승만괴뢰도당(정부)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공화국(북한) 정부의 합리적인 방안들을 거부하고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여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272쪽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북한의 침략’과 관련된 자료들만 공개해왔다.
그렇다면 북한이 ‘한국의 침략’이라고 바라보는 근거는 무엇일까?
“북한은 왜?” 시리즈가 북한의 역사를 소개하는 글이므로 북한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한국의 침략’이라고 바라보는 이유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6월 25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선을 경계로 서로 맞대고 있는 옹진, 개성, 동부 해안지구에서 북한군과 한국군 사이에서 전투가 개시되었다.
이 날 북한 외무성은 다음과 같이 두 차례에 걸친 공식보도를 한다.
1) 오늘 6월 25일 이른 새벽 남조선 괴뢰정부는 38도선 전역에 걸쳐 38도선 이북지역으로 불의의 진공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진공을 개시한 적은 해주방면 서쪽, 금천방면, 철원방면에서 38도선 이북지역으로 1~2km까지 침입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성은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침입한 적을 격퇴시키라고 공화국 경비대에게 명령하였다. 현재, 공화국 경비대는 진공하는 적을 요격하면서 가열찬 방어전을 전개하고 있다. 공화국 경비대는 양양 방면에서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침입한 적을 격퇴시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만일 남조선 괴뢰정부 당국이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모험적 전쟁행위를 즉각 중단하지 않는다면 적을 제압하기 위해 결정적인 대책을 취할 것이며 동시에 이 모험적인 전쟁 행위에 의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남조선 괴뢰정부 당국에게 주의시킬 것을 공화국 내무성에 위임하였다.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비대는 오늘 6월 25일 이른 새벽 38도선 부근 전 지역에 걸쳐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불의의 공격을 개시한 남조선 괴뢰정부의 소위 국방군의 침공을 요격하고 가열찬 방어전을 전개한 결과 적의 진공을 좌절시켰다. 인민군 부대와의 합동작전으로 공화국 경비대는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침입한 적을 완전히 격파하고 반격전에 들어갔다. 6월 25일 현재 공화국 인민군과 경비대는 다수의 지역에서 38도선 이남지역으로 5~10km까지 전진하였다.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
북한은 최초의 보도에서 한국군이 38도선 전역에서 불의의 공격을 감행해 북한군이 방어전을 진행하고 있으며 강원도 양양지역의 경우 침략한 한국군을 격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두 번째 보도에서는 경비대와 인민군이 한국군의 침략을 격퇴시킨 후 즉각 반공격에 들어가 다수 지역에서 38선 이남으로 5~10km 진전한 상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리하면 한국군이 38도선을 전면적으로 침략해 북한군이 이를 방어한 후 38선 이남으로 전진했다는 것, 즉, 전면적 북침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북한군의 남침설” 주장과 완전히 상반된다.
그렇다면 북한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은 있는 것일까?
현재 한국에서 출판된 한국전쟁 관련 도서들에는 북한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언들이 소개되어 있다.
북한의 보도(해방일보, 1950.7.6.)에 따르면, 김효석(전 내무장관)은 6월 30일 밤 8시경 종로구 옥인동 인민위원회를 찾아와 자수했다.
그리고 이틀 후 1950년 7월 8일자 해방일보에는 ‘이승만이 북벌을 명령했다’는 김효석의 증언이 실렸다.
김효석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는 1949년 7월 북벌을 음모했다 실패했으며,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 “재등용한 김석원과 채병덕에게 북벌”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또한 작전은 김석원이 주장하던 대로 “옹진방면으로 해주를 점령하고 평양을 점령하려 하였으며 동부전선에서는 이에 옹호하기 위하여 38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 북한은 옹진 방향으로 한국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포로들의 증언을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1950년 6월 30일자 노동신문에 따르면 한국군 17연대 소속 정훈장교 한서환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금년 5월에는 전 국방군의 사단장회의가 열리었는데 여기서는 각 연대장급도 참가하여 작전계획을 토의하고 이북침공을 위한 작전계획 에이(A)·비(B)·씨(C)의 3개안이 수립되었다….24일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사로 되었던 연대본부 장교들의 외출이 금지되고 대기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자못 긴장한 분위기 가운데서 이날 밤을 새웠는데 25일 새벽에는 드디어 28선 이북 지역을 향하여 일제 침공하라는 육군본부 극비명령이 하달되었다. 불의의 침공을 개시한 각 부대들은 옹진지구 전역에 걸쳐 38선을 돌파하고 대개 1키로 내지 2키로 지점까지 전진하였다. 제17연대 제1대대는 벽성군 가천 방면 중앙지대로 제3대대는 까치산 방면으로 각각 전진하였고 제2대대는 예비대대로 있다가 후에 중앙선에 포치되었다. 우리의 진공이 개시되어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는 공화국 경비대의 맹렬한 반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의 38선 충돌은 과거 어느 전투보다도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 38선 이북 2키로 지점에서 우리는 경비대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일전일퇴 하였었는데 먼저 까치산 방면에 출동하였던 제3대대가 교전중이라는 급보를 받은 이후 각 전선의 연락망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6, 580~581쪽
한국군 제17연대 1대대 제3중대 제4소대 3분대 최동성의 증언도 노동신문에 보도되었다.
38선 이북 지역으로 불의의 진공을 하여오던 내가 속한 옹진지구 국방군들은 25일 아침 인민군측으로부터 하늘이 터질 듯한 포 사격과 보병들의 강력한 반격이 시작되자 그대로 우리는 일대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나는 이날, 즉, 25일에 옹진 은동 뒷산에 숨었다가 전투개시 후 한 시간 만에 경비대에서 포로되었다.
-노동신문, 1950.6.30. /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6, 581쪽.
이외 “38선 이북에 침공을 개시한 후 순식간에 맹렬한 반격에 의하여 제1선 부대는 습멸하고 위험하게 되었다.”라고 증언한 한국군 제17연대 제3대대 12중대 1소대 소속 박윤제는 갑자기 비상소집이 있은 후 머지않아 ‘해주를 지나 평양을 점령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17연대장을 비롯한 상관들이 2시간이면 해주를 점령한 후 평양까지 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군 제17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제4소대 제3분대 최순종 역시 “38선 지역에서 내가 속했던 국방군들은 북조선에 침입하자 곧 대혼란에 빠졌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개성에서 금천 쪽으로 북침을 했다는 1사단의 경우 박건춘 야전공병대 2중대 1소대 2등상사, 오정혁 12연대 2대대 6중대 2등중사 등 증언을 했는데 “6월 25일 이른 새벽 개성 방면으로부터 평화스러운 38선 이북 지역에 침입”했다고 주장했다.
이 외 당시 해외에서도 한국 이승만 정부가 먼저 침략을 했다는 북침설을 주장하는 언론들이 있었다.
러시아 “프라우다”, 중국 “인민일보”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언론들은 북한 보도를 인용해 한국군이 북침했다고 보도했다.
자본주의 진영 언론에서도 한국군이 북침했다는 보도를 한 신문들이 있었는데, 미국 “데일리 워커(Daily Worker)”의 경우에도 한국군이 북한을 먼저 침략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신문(데일리 워커)는 6월 26일자에서 평양의 방송을 인용하여 “남한의 공격이 격퇴되었다”고 일면 머릿기사로 보도하였다….또한 사설에서는 “덜레스가 도착한 후 곧바로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이승만정권은 인민에 맞서 제국주의세력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Ⅰ), 나남출판, 1996, 455쪽.
※ 전쟁 직후 한국에는 한국전쟁 관련 가짜뉴스가 성행했다.
한국에 전쟁발발 소식이 최초로 전해진 것은 전쟁 개시 6시간 후 UP통신 보도를 통해서였다.
한국 주재 제임스 특파원 발 단편 보도
한국 38선에서 일요일 새벽에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침공하여 왔음을 전함. 현지 시간 9시 30분의 보고로는 서울의 한국군 사령부에서 북쪽으로 65킬로 거리에 있는 개성에서 한국군 제1사단이 9시경 격파되고, 옹진반도의 남쪽 3, 4킬로에서 한국군이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음. 보고에 의하면 동해안의 강릉 아래에 20정의 소형 선박들이 바다에서 상륙하고 있음. 해안도로를 차단했다고 함. 아직 단편적이고 불명확한 것임을 강조해 둠.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96쪽.
미국 UP통신 보도는 주한 미 대사관의 설명에 따른 것이었다.
최초보도의 출처는 한국군이 아닌 미 대사관 측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소식은 곧 해외에 타전되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공식적으로 전쟁을 발표한 것은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군의 25일 낮 12시 담화 때였다.
전쟁이 발발한지 8시간(한국 측 주장 발발시각 오후 4시에 따르면)이 지나서야 한국인들에게 전쟁소식이 알려진 셈이다.
그 시각이 지난 후에야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의 주장을 인용해 북한의 남침설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이북괴뢰 불법남침”이라고 보도하였고 경향신문은 “북괴군 전면남침기도”, 서울신문은 “괴뢰군 남침, 국군각지서”이라고 기사타이틀을 뽑았다.
그러나 다음날인 6월 26일 서울의 신문들은 갑자기 논조를 바꿨다.
일제히 ‘북진’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한국군이 승전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동아일보는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 조선일보는 “국군일부 해주 돌입”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6월 28일 북한군의 서울 진주에 임박했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결국 한국 언론이 끊임없이 ‘가짜뉴스를 보도’한 것이다.
‘뒤죽박죽’ 보도는 미국 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6월 25일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요 일간지들이 일제히 “남한이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침략당했다”고 보도한 후 6월 26일부터는 일제히 남한군의 반격과 해주돌입을 보도했다.
심지어 이들 신문은 북한이 6월 25일 오전 11시에 라디오를 통해 선전을 포고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이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보도들은 ‘완벽한 가짜뉴스’였다.
왜 한국과 미국 언론은 가짜뉴스들을 유포했을까?
그 출처는 어디일까?
이는 68년 동안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다.
미국, 한국 주요 일간지의 ‘가짜뉴스’ 보도는 훗날 미국 학자들-이시도어 스톤(Isidor F. Stone), 굽타(Karunakar Gupta), 데이비드 콩드(David Conde),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 등-이 한국과 미국이 한국전쟁을 일으켰거나 사전에 알고도 묵인했다는 주장의 한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