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1일
기사 제목 : [아침햇살115] 촛불항쟁 세력의 특징 (1)
현재 한국 정치의 모든 일들은 박근혜 탄핵 촛불항쟁(이하 촛불항쟁)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촛불항쟁을 제대로 모르고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한민국엔 4.19혁명, 부마항쟁, 5.18광주항쟁, 6월항쟁 등 여러 항쟁이 있었지만, 촛불항쟁은 기존 항쟁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촛불항쟁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주권의식을 보인 항쟁이다. 그래서 이번에 촛불항쟁, 촛불역량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1. 박근혜 탄핵 촛불항쟁이 예전 항쟁과 다른 점
촛불항쟁은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4월 29일까지 연인원 1,800만 명이 나선 항쟁이었다. 촛불국민은 무엇보다 박근혜를 탄핵하고자 했고 이를 실현했다.
촛불항쟁 세력은 탄핵에 성공한 뒤엔 촛불항쟁의 뜻을 실현하라고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다. 촛불항쟁 세력은 문재인 정부에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 한반도 평화와 국익 외교 등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를 요구했다. 촛불항쟁 과정에서 나온 요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정농단 세력을 비롯한 적폐청산,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국정교과서 폐기, 국정농단에 참여한 삼성 이재용 처벌 ▲최저임금 1만 원, 비정규직 권리보장, 중소상인 살리기, 쌀값 보장, 18세 선거권 보장 등 사회대개혁 ▲위안부 합의 무효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폐기, 사드배치 중단 등 평화와 국익 외교 등이 있다.
이러한 촛불항쟁은 과거 주요 항쟁들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4.19혁명
먼저, 4.19혁명을 보자.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이 직접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게 아니었다. 이승만을 끌어내린 건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은 4.19혁명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승만을 끌어내렸다. 지금은 공개돼있는 주한 미 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을 보면 이승만이 하야한 1960년 4월 26일 매카나기 당시 주한미대사는 이승만 정권에 선거를 다시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미 CIA 책임자 피어 드 실바는 아침 9시 40분 경 “2시간 안에 총사퇴를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아침 10시 반, 실바가 경고한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 민주당 장면 정권이 등장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5.16쿠데타는 미국이 개입한 작품이다. 당시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내가 재임 중에 CIA 해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쿠데타였다. … 만약 미국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민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른다”라며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미국의 공작임을 공개했다. CIA는 1961년 4월 21일부터 26일까지 8차례에 걸쳐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 중이라고 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것도 주한미군 사령관이다.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인 카터 매그루더는 쿠데타를 진압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도 거절하고 박정희의 움직임을 용인했다. 5월 17일, 미 국무부는 “현재 귀하(주한미대사)와 매그루더 장군이 보이고 있는 상황 대응에 대해서 우리는 100% 지지하고 있다”라고 재확인했다.
이렇게 박정희의 쿠데타로 대한민국엔 파쇼체제, 독재정권이 수립됐고 이로써 4.19혁명은 완전히 유린당했다. 그래서 4.19혁명을 두고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곤 한다.
부마항쟁
이번에는 1979년 부마항쟁을 보자. 당시 부산과 마산엔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는 항쟁이 일어났다. 10월 17일에는 부산에서만 5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10월 19일에는 마산지역 학생 8,000명이 집회를 열었다. 서울지역의 대학생들은 부마항쟁에 동참하기 위해 어떻게 시위를 할지 논의했다. 부마항쟁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박정희는 부산 마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서울지역에서도 시위가 일어나면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 준비했다.
부마항쟁 때에도 역시 미국이 개입했다. 미국은 부마항쟁이 전국으로 확산하면 박정희 정권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은 항쟁을 무마하기 위해 김재규를 내세워 박정희를 제거했다.
김재규는 미국과 상당히 가까운 인물이었다. 김재규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와 로버트 브루스터 CIA 서울지부장을 자주 만났다. 미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을 보면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를 통해 한국 권력층과 접촉했다고 밝혔다.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에게 미국의 요구를 전달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를 만나 평화적 정권 이양이 필요하다고도 언급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김재규는 미국의 지시를 받아 10월 26일 박정희를 총으로 죽인 듯하다.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는 미국이 박정희에게 ‘충고’했지만, 박정희는 미국의 충고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등의 진술을 했다. 이런 식으로 김재규는 재판 내내 자신의 행동이 미국의 뜻을 따른 것임을 내비쳤다. 뉴욕타임스는 1979년 11월 5일 “죽인 것은 한국이지만 지시한 것은 미국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박정희 사후엔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광주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미국이 광주학살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이 알려졌다. 그 결과 국민의 항쟁은 자취를 감추고 군사독재정권이 연장됐다. 부마항쟁, 광주항쟁의 뜻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무위로 끝난 것이다.
6월항쟁
그 뒤엔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났다. 6월항쟁은 군사독재정권을 끝내고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벌어졌다.
미국은 6월항쟁에도 개입했다. 당시 전두환은 군대를 투입해 6월항쟁을 제압하려 했다.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미대사는 사태를 키우지 않기 위해 전두환의 군대 투입을 막았다. 미국 정부는 게스틴 시거 당시 아태지역 차관보를 한국에 파견했고 시거 차관보는 6월 24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각각 만났다. 시거는 노태우에게 “권력 이양은 반드시 평화적이어야 하며 한국 정부는 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6월 29일,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과정에서 6월항쟁은 추구하던 바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직선제 개헌을 얻어내기는 했지만, 전두환 정권은 여전히 유지됐다. 전두환 정권의 뒤를 이은 것은 노태우였다. 이번에도 군사독재정권이 연장된 것이다.
촛불항쟁
앞선 항쟁들과 비교해서 촛불항쟁은 자기 목적을 기본적으로 실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촛불항쟁 세력은 박근혜 정권을 자기 힘으로 거꾸러뜨렸다.
미국도 박근혜 탄핵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당시 기무사는 계엄령을 선포한 후 광화문을 비롯한 서울 주요 지역에 군부대를 배치해 촛불항쟁을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기무사의 계엄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국민의 기세에 눌려 차마 실행할 수 없던 것이다.
국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시 국회는 박근혜 탄핵이 아니라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했다. 대선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그때까지 박근혜가 2선으로 후퇴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한 것이다. 박근혜 측도 버티는 척하다가 질서 있는 퇴진을 수용했다.
6월항쟁 때에는 이런 기만책이 통했다. 전두환 일당이 6.29선언을 했을 때 국민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촛불항쟁 때는 달랐다. 국민은 질서 있는 퇴진을 용인하지 않았다. ‘촛불의 명령’이라며 ‘박근혜를 탄핵하라’라고 요구했다. 결국, 국회는 박근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촛불항쟁은 이전 항쟁과는 다르게 정권 창출에도 성공했다. 촛불항쟁 세력은 촛불항쟁의 뜻을 실현하라며 미흡하지만 문재인 정부를 출범시켰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촛불항쟁의 주도세력이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거국 내각을 구성하자며 박근혜의 명예로운 퇴진을 언급하는 등 촛불혁명을 철저히 따르지 않고 개량적인 태도를 보였다.
촛불에 전면 뛰어든 것은 진보세력과 민중이다. 진보세력은 2015년 6월 민주정권을 수립하자며 ‘민주주의국민행동’을 결성했다. 2015년 11월부터는 민중총궐기를 진행했다. 1차 민중총궐기 투쟁 때 박근혜 정권이 백남기 농민을 죽음으로 내몰자 진보진영은 박근혜 정권과 전면적으로 싸웠다. 국민은 2016년 4월 13일, 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을 만드는 데 성공해 촛불항쟁에 불을 붙였다.
박근혜 퇴진을 가장 먼저 요구한 건 민주주의국민행동이다. 태블릿PC 보도가 나온 다음날, 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퇴진을 요구했다. 그 후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백남기투쟁본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4.16연대, 민주주의국민행동이 박근혜 탄핵 촛불을 주도해 나갔다. 기무사는 박근혜 탄핵촛불을 진압할 목적으로 박근혜 퇴진을 가장 먼저 요구한 민주주의국민행동을 사찰해 간첩사건을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렇듯 촛불항쟁을 주도한 건 진보세력이다. 그러나 진보세력은 항쟁을 주도했으면서도 조직적, 정치적으로 집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항쟁주도세력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촛불항쟁 세력이 자기 목적을 미흡하지만 그나마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촛불항쟁 세력이 자기 요구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는 정권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앞선 항쟁들과의 뚜렷한 차이이며 촛불항쟁의 특징이다.
2. 많이 발전한 촛불항쟁 세력의 정치의식
촛불항쟁 세력은 박근혜 탄핵, 차기 정권 창출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기 요구를 주장하고 관철해 나가고 있다. 사법농단의 우두머리인 양승태 대법원장을 처벌하고, 이명박·박근혜를 구속하며 검찰개혁에 나섰다. 지금도 촛불항쟁의 연장선이며 촛불세력이 계속 전진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도 이전 항쟁과 완전히 다르다. 4.19혁명 주도세력은 5.16쿠데타 이후 완전히 해산되고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부마항쟁 주도세력은 전두환의 등장과 광주학살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6월항쟁의 경우에도 정권을 노태우에게 뺏기며 항쟁 주도세력에 패배주의가 퍼졌다. 지금까지의 항쟁에는 항상 미국과 적폐들의 반 항쟁 책동이 있었고 이는 번번이 먹혀들어갔다.
이와 비교할 때 촛불항쟁 세력은 박근혜 탄핵 이후에도 계속 정치적으로 각성해 자기 요구를 전진시키고 있다. 정부를 세우고 총선에서 이겼으니 나머지는 정부와 국회에 맡기고 이제 우리는 생업에 몰두하자는 식으로 뒤돌아서지 않았다. 이제는 정부나 국회가 되는 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고 국민의 요구대로 움직이도록 압박하고 견인하고 있다.
이 차이는 국민 속에 국민이 나라의 주권을 갖는다는 주권의식이 굉장히 높은 차원에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나라는 적폐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국민의 요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주권의식의 성장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사례로 검찰개혁과 이낙연 민주당 대표의 이명박·박근혜 사면론을 들 수 있다.
검찰개혁 촛불
2019년 가을부터 검찰은 조국 사태를 일으키며 촛불항쟁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를 사실상 거꾸러뜨리기 위해 나섰다. 검찰은 물론이고 언론과 적폐정당 등 적폐세력이 총동원됐다.
이전에도 항쟁 뒤에 이런 도전이 있었다. 박정희는 수많은 공안사건을 터트려 진보세력을 말살하려 했다. 전두환은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이후 북한 특수부대가 파견됐다는 등 북풍공작을 폈고, 그 논리가 먹혀들어 갔다. 6월항쟁 때에는 대선에 맞춰 칼기 폭파사건을 활용했다. 칼기 폭파사건은 노태우가 집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민주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도 정권을 거꾸러뜨리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에는 검찰이 이른바 ‘옷로비사건’을 조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날 언론에 김태정 법무부 장관 임명자의 부인이 고가의 옷을 로비로 받았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여권 인사들이 줄줄이 옷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고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도 거론됐다.
훗날 일이지만, 옷로비사건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실체 없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적폐들의 집요한 공격에 결국 김태정 법무부 장관을 해임하며 타협을 선택했다. 옷로비사건은 적폐의 김대중 정권 길들이기 차원으로 진행됐고 적폐들은 여기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취임 초 적폐세력들이 ‘대북송금특검’을 들고 벌떼처럼 나섰다. 대북송금이란 김대중 정부 당시 현대가 북한으로부터 7대 사업권을 얻어냈고 그 대가를 지불한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가 현대 대신 송금을 해준 것이다. 현대 입장에서는 정당한 ‘사업’을 추진했고 정부 입장에서는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통일 ‘정책’을 추진한 국가통치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적폐야당과 언론, 검찰 등은 이를 위법이라며 물고 늘어졌다. 터무니없는 억지공격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그만 이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해버렸다. 김대중 대통령 측과 민주당 내에서 반발이 나왔음에도 이뤄진 결정이었다. 적폐가 정권을 흔들자 노무현 대통령이 맞서지 못하고 굴복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적폐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졌거나, 통일문제에 대한 관점이 올바르고 철저했다면 대북송금특검을 받아들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적폐에 길들여졌다. 적폐세력이 반대하면 정책을 강행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임기 내내 적폐세력에게 시달리다 결국 대선에서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 때에는 조국사태가 있었다. 문재인 정권이 홀로 적폐들의 공격을 감내해야 했다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조국 법무부 장관을 사퇴시키며 금세 타협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국민이 검찰개혁 촛불을 들어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켜냈다.
과거 항쟁에 빗대자면, 이는 4.19혁명을 뒤집으려는 5.16쿠데타를 저지한 것과 다름없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을 저지한 것이고, 6월항쟁 이후 군사독재정권을 연장하려던 노태우의 집권을 저지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듯 촛불항쟁은 적폐의 반 항쟁 시도를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이전의 항쟁과 다르다.
촛불항쟁 세력이 검찰개혁 촛불을 드는 과정에서 국회는 공수처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역시 민주당이 알아서 공수처법을 통과시킨 게 아니었다. 촛불이 ‘국민의 명령이다’라며 공수처법 통과를 요구했기 때문에 공수처법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촛불항쟁 세력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기대고만 있지도 않았고 검찰과 적폐정당의 반격에 그대로 당하지도 않았다. 모든 난관에 맞서 싸웠고 하나 하나 자기 요구를 실현해가고 있다.
이낙연 대표의 이명박·박근혜 사면론
올해 초엔 또 다른 의미심장한 사건이 있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1월 1일 이명박·박근혜 사면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사면론이 나오자 곧바로 민심이 들끓었다. 촛불세력은 엄청난 여론을 형성해 이낙연 대표를 질타했다. 이낙연 대표는 차기 대권주자 지지율 1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사면론 이후 사실상 대권주자에서 탈락했다.
사실, 이낙연 대표의 사면론은 문재인 대통령과 조율한 것이라는 평이 많다. 한겨레는 이낙연의 측근 말을 인용해 “사전에 청와대랑 조율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이 끝나면 (사면에 대한) 청와대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만큼, 당이 (미리) 일정 정도의 부담을 떠안아주겠다는 취지가 아닐까 생각한다”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대표는 지난해 12월 26일 독대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대표가 여기서 사면론에 대해 의견을 나눴고 공감대를 이룬 것 같다는 관측이 있다. 그러나 사면론에 대한 반발이 극심해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1월 18일에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발을 뺐다. 촛불세력이 사면론을 물리치고 자기 뜻을 관철한 것이다.
이런 모습도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과거 국민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결정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김영삼의 3당 합당이다. 3당 합당은 1990년 1월,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일을 말한다. 1988년에 열린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면서 여소야대 국면이 펼쳐지자 적폐세력들이 3당 합당을 이뤄 다시 여대야소 국면으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은 김영삼의 지지자들이다. 김영삼은 부산·경남, 소위 ‘PK’라고 불리는 지역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었다. 부마항쟁에서 볼 수 있듯 부경지역은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진보적인 지역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할 때, 부경 민심은 ‘어떻게 저들과 야합할 수 있냐’라며 김영삼을 규탄하고 저지한 게 아니었다. 김영삼의 결정을 따라 보수화되었다. 그래서 3당 합당 후 부경지역은 민자당의 텃밭이 됐다. 1992년 대선 땐 전두환·노태우 세력과 김영삼 세력이 부산 초원복집에 모여 “우리가 남이가”라며 담합을 도모하기까지 했다.
이런 현상은 당시 민심은 정치인을 따라가며 의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정치인의 움직임이 바뀌면 민심도 바뀌고 정치인이 변절하면 민심도 따라갔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촛불항쟁 세력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그저 따라가는 게 아니다. 이들이 잘못한다고 생각하면 규탄하고 저지한다. 촛불 명령대로 움직이라고 강하게 압박한다. 지금 촛불항쟁 세력은 이전과 달리 주권의식이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물러섬 없는 촛불항쟁
촛불항쟁 세력은 지금 검찰개혁을 외치고 있다. 윤석열 검찰과 언론 기레기들, 극우적폐세력은 계속 반격해오고 있다. 공수처만 해도 법을 제정하는 데 1년, 법 통과 후 공수처장을 선출하는 데 1년, 이런 식으로 더딘 걸음을 하고 있다.
국민 속에선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개혁이 이렇게 어렵냐’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물론 개혁이 힘들다는 고충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국민의 주권의식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국민이 ‘내가 나라의 주인이고 나의 의지대로 되어야 하는데 적폐가 막고 있어 실현되지 않고 있다’라는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엔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되는 게 없네. 정치인은 다 거기서 거기구나’라는 식으로 패배주의에 빠지곤 했다.
사실, 지금 정말 힘들어 하는 건 적폐들이다. 과거에는 항쟁이 일어나도 쿠데타를 하거나 6.29선언을 하면 열기가 가라앉았다. 간첩조작사건이나 색깔론을 퍼트리면 여론이 반전되곤 했다. 정 안 되면 일부를 포섭해서 정계개편을 하면 됐다. 그러면 항쟁세력은 패배주의에 빠져들고 분열이 일어났다. 그런 식으로 적폐들은 또다시 자기들 세상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수작이 먹히지 않는다. 촛불항쟁 세력은 이 나라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개혁국면을 직접 끌어간다. 적폐가 아무리 주도권을 빼앗아보려 시도해도 촛불항쟁 세력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 싸우고 있다. 그래서 촛불항쟁 세력이 더딘 개혁에 답답해하기도 하지만, 사실 정말로 좌절을 맛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적폐들이다.
적폐들은 종종 대한민국이 남베트남처럼 적화가 될 거라며 지지를 호소하곤 한다. 2018년엔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와 안상수 의원 등은 북미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등 한반도 평화분위기가 조성되는 걸 두고 베트남과 같이 공산화될 수 있다며 평화협정 체결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당시 남베트남은 부정부패로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 적폐들이 은연중에 썩을 대로 썩은 남베트남 집권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여튼, 이런 발언을 하는 걸 보면 적폐세력은 남베트남의 부정부패한 집권자들이 무너졌듯 자기도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이렇게 된 배경엔 적폐세력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촛불혁명의 뜻을 한 발 한 발 실현해나가고 있는 촛불항쟁 세력이 있다.
2007년 말, 우리는 이명박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지지부진한 노무현 정권에 실망한 나머지 패배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촛불항쟁 세력은 문재인 정부와 이낙연 민주당이 개혁에서 후퇴하려 할 때에 거기에 실망하고 패배감에 빠져 주저앉지 않는다. 더 개혁적이고 더 촛불혁명 정신에 투철한 정치인을 찾아 지지를 몰아주는 식으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런 양태를 주목해 봐야 한다.
(계속)
이형구 주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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