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1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북한에서 성매매를 없앴다고? ①
– 1946년 남녀평등권 제정과 그 의미 –
조선 여성들은 오랫동안 낡은 봉건제, ‘남존여비’사상, 삼강오륜 등 유교적 윤리사상에 의해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왔다.
‘삼종지도(三從之道)’ 라고 있다.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에 나온 말로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된 ‘삼강오륜'(三綱五倫)에도 등장한다.
2500여 년 전 “공자가어 본명해편”에서 유래된 칠거지악(七去之惡)도 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아내나 며느리를 내쫓을 수 있다는 내용의 칠거지악은 여성들을 괴롭혀 왔다.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일생의 대부분을 가사노동, 시부모 모시기, 아들 낳기, 육아만 해야 했다.
가사 노동 외의 경제활동에 전혀 참여해서는 안 되고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했으며 문밖출입도 마음껏 하지 못했다.
봉건제, 가부장적인 문화로 여성이 가정 내에 묶어 억압의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1. 일제 강점기
1) 현실
일제 강점기, 조선 여성들이 더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수천 년 동안 중세기적 봉건관계 속에서 억눌려 살아온 조선 여성들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이중삼중 착취와 억압을 당하며 인간 이하의 처지에서 허덕였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식민지 노예로 영원히 ‘부려먹기’ 위해 강점 첫날부터 악독한 우매화 정책을 실시했고 여성은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일제에 의해 ‘장려’되었던 당시, 식민지 남성들도 학교를 가기 어려웠던 조건에서 여성들이 글을 배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다수의 식민지 여성들은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로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살아야 했던 것이다.
조선 여성들의 인권, 권리에 관심이 없었던 일제는 조선 시대 때 존재해온 성차별, 성유린의 현장을 그대로 방치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기생제도를 유지했으며 공창(국가에서 매춘을 합법화하고 관리하는 것), 사창(성매매를 할 수 있는 업소들이 모여있는 곳)를 관리·운영하면서 많은 여성들이 유린당하고 천대받도록 했다.
1920년대 조선에는 생계유지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여성 노동자들은 민족적 억압과 계급적 착취에 성적 차별까지 3중고를 겪고 있었다.
여성의 힘에 부치는 고된 노동, 감옥 같은 기숙사, 거친 음식에 구타까지 인간 이하의 대우 속에서 여성들의 육체와 정신이 모두 파괴되어갔다.
공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엄청난 구타를 당하는 일도 잦아 여성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지옥의 나락에 떨어진 ‘식민지 노예’들이었다.
많은 여성 농민들도 일제의 억압과 지주의 착취, 봉건적 구속을 함께 감내해야 했다.
특히 일제와 친일파에게 땅을 빼앗기고 먼 이국땅으로 쫒겨난 여성들은 남의 집 식모로 팔려간 경우도 많았다.
일제가 여성들에게 저지른 만행 중 끔찍한 것은 바로 위안부, 즉, 성노예였다.
일제는 20여만 명에 달하는 조선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먼 전선으로 끌고 갔다.
1940년대 초중반 패전이 짙어지면서 일제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대부분의 위안부 여성들을 학살한다.
2) 저항
착취와 억압에 조선 여성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일제 36년간의 억압에 조선 여성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00년대 후반부터 여성들은 봉건제,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회정치적 주인으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여성운동,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들의 가부장제 타파, 권리보호, 인권을 위한 움직임은 개화사상, 동학사상들이 등장했던 19세기 여성들의 교육권을 보장하자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1898년 9월 양성당 이씨, 양현당 김씨 등 서울 북촌의 양반부인들이 ‘독립신문’에 ‘여학교설시통문’을 발표하고 여성교육운동을 추진한다.
그러면서 1900년대 초 많은 여성교육단체들이 조직되고 사립 여학교가 96개교까지 설립되었다.
‘여학교설시찬양회’ 등의 여성교육단체들은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강제 해산당하고 만다.
이후 여성들은 일제 감시 하에서도 전국에 평양 숭의여학교 송죽결사대 등 여성비밀결사모임을 꾸려 활동해나갔다.
여성독립운동 조직력은 3.1운동 당시 여성들의 적극적 참여로 이어졌다.
당시 유관순 등 청년·지식인 여성들은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선언문을 인쇄·배포하면서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1920년대 여성들이 더욱 각성되면서 1923년부터 1927년 정도까지 식민지 조선에 2백여 개나 되는 조선여성근우회 등 여성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여성노동자들도 일제의 노동착취에 맞서 선미 여성 노동자 파업, 1923년 경성고무 여직공 파업, 1926년 안주 염직소 여성 노동자의 파업 등을 일으켰고 여성농민들이 소작쟁의(소작인, 농민들이 일으킨 투쟁. 일제 강점기 소작료 비율을 수확물의 최고 7-80%까지 올리기도 했다.), 농민조합에 적극 참가하기도 했다.
1932년 제주도 해녀 투쟁, 매춘 여성들의 파업 등도 일제 강점기 주목해 볼만한 여성 독립운동의 한 장면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