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1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북한에서 성매매를 없앴다고? ②
북한에서 성매매를 없앴다고? ②
– 1946년 남녀평등권 제정과 그 의미 –
3) 일제 강점기 ‘여성해방’을 실천에 옮기다.
조선 여성들이 꿈꿨던 ‘여성해방’이 수천 년 우리 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현실로 꽃피워진 것은 1930년대 동만주였다.
바로 인민혁명정부가 있었던 조선인 유격근거지에서였다.
유격근거지는 여성이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분야에서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세상, 착취와 억압이 없고 구속이 없는 사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며 살아보았으면 하는 조선 여성들의 세기적 숙망이 실현된 공간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일제가 싫어서, 혹은 살기 힘들어서 고향을 떠나 먼 만주벌판에 나가 살고 있었다.
특히 일제의 강도 높은 탄압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떠나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30년대 초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동만주지역에 유격근거지-해방지구를 만들게 된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20쪽.
유격근거지 창설은 1932년 봄부터 일본제국주의의 야수적 대학살을 피해 산악지대로 들어온 민족 구성원들을 지키면서 시작되었다.
1920년 간도참변으로 혹심한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은 지형조건이 유리한 지역으로 결집해나갔고 유격군대를 꾸려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 공세를 격파하면서 삶을 영위해나갔다.
유격근거지는 일제나 중국정부의 통치가 없는, 완전한 조선인들의 세상이었다.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역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고 만민평등을 현실로 꽃피우고자 했다.
이들은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해방의 강령도 마련했다.
당시 인민혁명정부의 강령에는 “모든 노동자, 농민, 유격대병사·지휘관 및 학생, 상인 기타의 반일, 반만, 반제 대중 및 그들의 가족을 남녀, 종족, 종교, 신앙의 차별 없이 모두 평등하게 혁명정부의 공민으로서 평등권을 가지며 16세 이상은 모두 선거권, 피선거권을 가진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일제 관헌자료에 수록된 “임시동북인민혁명정부정강 초안”(1934년 6월 10일자 왕청현 당위원회에서 발행)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34쪽.
강령에 따라 유격근거지에서는 민족 역사상 최초로 근대민주주의, 즉, 보통투표·직접투표·평등투표를 실시했다.
봉건적 인식이 남아있었음에도 독립운동가들은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똑같이 투표권을 줬다.
이리하여 많은 여성들은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인민혁명정부의 회장을 비롯해 혁명정부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시 모든 여성들이 반일부녀회와 공청을 비롯한 혁명조직과 반군사조직에 망라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여성해방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이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았던 유격근거지에서 인민혁명정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애국적인 지주들의 땅은 그대로 두고 2·8제(20%가 소작료)를 실시했으며 친일 지주들의 경우 땅을 빼앗아 남녀 균등 토지분배정책을 시행했다.
2. 토지분배는 노동력을 기준으로 하여 (예를 들어 남자 15세 이상 50세 이하, 여자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사람은 하나의 노동력으로 계산한다.) 평균적으로 분배한다. 그러나 늘 빈농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다.
3. 여자에게도 반드시 토지를 분배하고, 또 철저히 봉건적 잔재의 소멸을 꾀한다.
– “만주공산비의 연구” 제1집, 82쪽.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35쪽에서 재인용.
남녀 똑같이 토지를 나눠준 유격근거지의 역사적 경험은 훗날 1946년 3월 38선 이북지역 토지개혁으로 계승되었다.
한편 유격근거지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은 배움의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야학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교육체계에 망라되어 우리 글을 배우고 혁명과 군사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
이렇게 남녀평등이 실현된 세상을 눈 앞에서 확인한 수많은 유격구 여성들을 일제에 반대하는 조국해방의 투쟁에로,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항일유격대를 계승한 조선인민혁명군에는 여성들의 요구로 여성중대까지 꾸려졌다.
민족 최초로 총을 든 여성 중대가 등장한 셈이다.
여성중대 성원들로 알려진 인물로는 김정숙 여사* 최희숙, 김철호, 장철구, 김확실, 리순희 등이 있다.
*김정숙 여사: 김일성 주석의 부인. 2000년 합의된 ‘남북 언론인 합의문’에서 합의된 상호 신뢰와 존중 차원에서 ‘여사’라 칭합니다.
이들은 식량과 식사를 준비하고 유격대원들의 피복을 세탁하고 헤진 옷을 꿰매는 일과 군복을 제작·조달하는 일에 종사했다.
이외에도 남자 군인들이 수행하는 망보기, 통신연락, 비행선전 파견, 삐라살포 등의 역할을 수행했고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중 허성숙 열사는 만주지역 조선족 동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허성숙 열사는 1939년 8월 안도현 대사하 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맞서 단신의 몸으로 기관총을 들고 적들을 저격하면서 부대의 이동을 엄호하다가 희생된 ‘여전사’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374-375쪽.
안도현 차조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허성숙은 15세에 지하공작 아저씨의 교육으로 혁명의식을 갖게 되고 16세에 소년선봉대에 가입한 후 망보기·통신연락·삐라살포에 참여했고 이후 1933년 가을 연길현 유격대에 들어갔다.
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1대 1연의 첫 여성기관총 반원이 된 허성숙은 임강전투·모령전투·안도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1937년 6월 간삼봉전투에서 무비의 용감성을 발휘해 기관총을 안고 연속 명중탄으로 전투를 대승리로 이끌었다.
허성숙 대원은 대사하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제에 체포되었지만 ‘귀순’을 거부하며 “조선민족…의 딸입니다. 일본침략자가 이 국토에 있는 한 나는 최후까지 단호히 항일할 것입니다.”를 외치며 24세의 한 생을 마쳤다.
‘불사조’라 불리던 최희숙 열사도 있다.
그가 체포된 것은 1941년 2월 연길현 용신촌 부근.
일제 토벌대에게 포위되어 부상을 입고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25쪽.
잔학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최희숙을 혹독히 고문하고 심지어 두 눈까지 도려냈다.
그러나 최희숙은 “나에게는 눈이 없지만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며 불굴의 투지로 침략자들을 질타했다.
결국 일제는 그녀의 심장까지 도려냈지만 끝내 최희숙을 변절시킬 수 없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적인 투쟁은 여성들도 사회의 당당한 한 성원, 역사를 발전시키는 한 축의 수레바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여성독립운동의 성장은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요구가 반영된 강령을 채택하도록 했다.
우선 대한민국임시정부 강령 “제 3장 건국”에는 ‘4-나. 부녀는 경제와 국가와 문화와 사회생활상 남자와 평등권리가 있음.’이 담겼다.
1936년 5월 조국광복회가 창건되었을 때에도 ‘7. 양반, 상민 기타의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별 없는 인류적 평등과 부녀의 사회상의 대우를 제의하며 여성의 인격을 존중할 것.’이 명시되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276쪽.
나라의 독립을 지향하는 조선인들에게 해방세상은 일제 식민지적 · 봉건적 착취와 억압, 인신(人身)적 예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여성들의 요구가 실현되는 공간으로 인식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