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1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북한에서 언제부터 연차유급휴가가 도입되었을까? ⑦
6) 북한식 ‘노동권 보장과 중요산업 국유화’의 특징은?
②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었던 북한식 ‘중요산업 국유화’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중국, 북한 등은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들 나라와는 상당히 다른 경제노선을 채택해왔다.
‘중요산업 국유화’ 조치는 그 중 하나였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북한식’의 첫번째 특징은 바로 중요산업 국유화를 일시에 무상몰수의 방법으로 실시했다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경우에는 산업의 국유화를 몇 단계에 나뉘어서 실시했다.
-현대조선문제강좌편집위원회편, “북한의 경제”, 도서출판 광주, 1988, 55쪽.
그만큼 산업 국유화가 신중성이 필요하고 어려운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달랐다.
1946년 9월 법령을 발표하며 전격적으로 국유화를 단행했다.
그만큼 이북지역에서 중요산업 국유화 조치가 어렵지 않게 추진가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노동자나 지방자치기구가 이미 해방 직후 공장을 접수했던 측면이 있고 일본인들이 일본 본국으로 돌아간 것, 친일자본가들이 이남으로 도주한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소련군과 협의를 통해 소련이 관리하던 군수산업을 모두 이관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이북 주민들은 국유화에 따르는 혼란을 전혀 겪지 않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빠르게 일본 총독부, 친일자본가가 관리하던 중요산업을 무상몰수할 수 있었다.
북한식 ‘중요산업 국유화’의 두 번째 특징은 민족자본가들의 소유권을 보장해준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0월 “개인소유권을 보호하며 산업 및 상업활동에 있어서의 창발성을 발휘시키기 위한 대책에 관한 결정서”를 발표해 개인 기업의 보호를 선언했다.
-정갑영,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 확립과 기본 정책 노선’, “북한의 경제”, 을유문화사, 1990, 41쪽.
이 결정으로 “조선공민의 개인소유였던 기업소”의 몰수에 대해 특별한 과정을 거쳐 재심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동유럽 국가들과 달랐다.
동유럽은 민족자본가의 기업들을 ‘유상’으로 몰수한 것이다.
즉, 국가가 민족자본가들의 기업을 사들여 모든 국가산업을 국유화한 것이다.
그러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그렇게 조치하지 않았고 민족자본가들의 경제활동을 장려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개인 소유권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애초 북한 사회를 주도한 독립운동가들의 노선이 그러했던 측면도 있었다.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혁명군 계열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에서 민족자본가의 재산은 보장할 것을 그 내용에 담았다.
4. 일본 국가 및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농, 상업을 장애 없이 발전시킬 것.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중에서
김두봉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화북조선독립동맹 계열도 해방 직후 “일본 파시스트 및 친일파한테서 몰수한 대기업을 국영으로 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할 것”과 “국가에서 개인공업의 발전을 보장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예대열, “2008_해방이후 북한의 노동조합 성격논쟁과 노동정책 특질”, 역사와현실 70호, 2008.12, 한국역사연구회, 214~215쪽.
따라서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했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개인상공업의 활동을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이었다.
3) 사상을 중요하게 바라봤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노동자, 개인상공업자들을 단순한 ‘경제정책의 대상’로만 보지 않았다.
해방 후 여러 악조건으로 무너진 이북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그 누구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 개인상공업자들의 주인성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췄다.
일하는 사람들을 나라의 주인으로 보고 ‘주인된 자각’과 ‘애국심’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 시작은 바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었다.
-통일뉴스, 임영태, ‘북한의 정부수립 기반 닦기 ③ 건국사상총동원운동’, 2001/04/06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새로운 애국·민주 사상을 갖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주인답게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나가자는 운동이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성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선전대를 조직해 북한 전역에 파견했다.
선전대는 주민들이 갖고 있는 나태와 안일, 사기와 횡령, 탐오랑비(貪汚浪費, 직무를 이용해 국가 재산이나 공공 재산을 훔치거나 함부로 써버리는 행위)에서부터 사업에서 고용자 근성과 무책임성, 형식주의, 관료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 일제 시기 가지게 된 사대주의 사상을 극복하자는 호소를 하면서 활동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김회일운동이다.
-조수룡, ‘1945~1950년 북한의 사회주의적 노동관과 직업동맹의 노동통제’, “역사와 현실(77호)”, 2010, 한국역사연구회, 398쪽.
노력혁신자 김회일을 따라 배우자는 운동이었다.
정주군의 철도기관사였던 김회일은 무사고와 수송량 기록을 계속 경신해 ‘노력혁신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채탄돌격대(석탄을 캐는 채탄작업에서 성과를 내기 위한 선봉대)를 제안했고 이북지역에서 주목을 크게 받아 최초로 ‘증산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1947년 7월에는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들이 전국의 공장·기업소 노동자들에게 증산경쟁운동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38선 이북 지역 전역에서는 ’47년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창조적 생산활동이 이어졌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민족자본가들에 대한 교육사업도 놓치지 않았다.
산업경제협의회를 통해 끊임없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활동과 사업을 해설함으로써 민족자본가들이 민족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나가도록 한 것이다.
해방 후 이북 전역에서 벌어진 사상운동은 비슷한 시기 동유럽에서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활동이었다.
이렇게 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대중의 열정과 의식을 고양시키는 사상운동의 경험을 쌓게 되었고 훗날 ‘사상개조운동’은 북한 사회의 주요한 대중운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노동법령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