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1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북한에서 언제부터 연차유급휴가가 도입되었을까? ⑥
6) 북한식 ‘노동권 보장과 중요산업 국유화’의 특징은?
① ‘노동해방’, ‘국유화’ 조치로 경제성장을 이루다.
해방 후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이북 지역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수백만 노동자들이 바랬던 8시간 노동제를 공포하였다.
사회보험제, 유급휴가, 출산휴가, 모유수유 보장 등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들도 함께 발표했다.
이런 조치들은 분명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행은 잘 이루어졌을까?
법령이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80% 이상의 노동자들이 직총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상황,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법령을 발표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소속의 ‘준공무원’ 지위였다는 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거의 모든 산업체 노동자들의 임금을 결정하고 관리했다는 측면에서 전반 조건이 노동법령이 지켜지기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북한식 ‘노동해방’은 북한 노동자들 삶에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단순히 노동자로서 자신의 인권이 존중된다는 인식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을 바꿔준 해방, 그리고 건국사업에 적극 뛰어들어야겠다는 열의까지 안겨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동법령과 국유화 조치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이 증산운동(생산증강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생산증강운동은 나라의 경제사정을 개선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사실 해방 직후 조선의 경제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가 조직적으로 산업시설을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19개소의 수력발전소, 178개소의 탄광과 광산, 47개소의 기업소를 파괴했으며 조업중단으로 인해 침수된 탄광과 광산만 64개소나 되었다.
안나 루이스 스트롱이 작성한 글에 따르면 일제의 파괴행위는 대단히 심각했다.
일본인들이 항복하기 전에 가능한 모든 것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지하조직은 이 모든 것을 방지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열차의 80%를 파괴했고, 화물객차나 수리작업장, 심지어는 선로부지까지 파괴하였다.
64개 광산에 물을 채워넣었고, 178개소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사용불능케 되었다.
전국제철공장의 모든 용광로와 고로, 평로 등을 원광을 넣은 채 가열시킴으로써 못 쓰게 만들어버렸다.
일례로 나는 평양 근교에 있는 조선 제일의 제강소인 강선제강소를 방문했었다.
일제 때 그곳에는 3개의 대형 용광로와 3개의 평로가 있었으며 7,8천 명의 노동자들이 신철, 강철, 강관, 코크 등을 생산해 미쓰비시 상사로 보냈다.
내가 방문할 당시 그곳에는 6,800명의 노동자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제강소를 재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 이야기로는 쇳물이 속에서 굳어버려서 3개의 용광로와 3개의 평로가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냐고 하자 그들은 조선인은 미숙련노동에 종사해서 기술적 과정을 맡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흥남의 화학공장들은 노동자들이 구했다.
이 공장시설은 조선 최대의 기업체로서 2만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는 원자탄 성분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일본인들이 그것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항복 당시 일본인들은 폭탄으로 이 시설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화학공장에 조선인 지하노조가 있었고 노동자들은 4시간 동안 무장투쟁을 벌여 일본인들을 쫓아냈다.
그러고 나서 노동자들은 폭약들을 찾아 내어 시한장치가 되어 있던 그 폭약들을 바다에 던져넣었다.
“그것들이 폭발했었더라면 공장뿐만 아니라 15만 시민 전부가 희생되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 내가 바닷가 휴양지에서 만났던 화학공장 노동자들의 얘기였다.
일본인들을 쫓아내고 곧 노조가 전면에 등장하여 공장 주변을 경비하고 지방정부를 수립하는 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글 가운데 ‘5. 공장노동자들과 더불어’ 중에서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30~131쪽.
그리고 일제 강점기 모든 산업이 일본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도 경제가 힘들었던 원인 중 하나였다.
당시 조선 공장들은 일본에 가서야 완성품이 되는 부품이나 반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완성품을 만드는 곳이 단 한곳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제는 조선의 산업시설들을 군수업 체계로 모두 바꿔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군수산업들을 주민생활에 필요한 ‘평화산업’으로 전환시키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발생한 산업간 연계의 단절 역시 큰 악조건이었다.
해방 후 이북지역에서 화폐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예대열, “2008_해방이후 북한의 노동조합 성격논쟁과 노동정책 특질”, 역사와현실 70호, 2008.12, 한국역사연구회, 216쪽.
은행과 신용기관이 모두 서울에 본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지점들이 서울로부터 1945년 9월 이후로는 화폐를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가가 안정화되지 못하면서 주민들의 경제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물자의 유통 역시 원활하지 않으면서 남북 경제 모두 불균형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런 현실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주민 생활 향상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노동자들의 생산의욕을 높이는 것이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증산운동을 발기했고 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조수룡, ‘1945~1950년 북한의 사회주의적 노동관과 직업동맹의 노동통제’, “역사와 현실(77호)”, 2010, 한국역사연구회, 400쪽.
1948년 증산운동에 한 해동안 1,490개소 공장·기업소에서 28만 8,021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이는 1949년 기준 북한 전체 노동자 수가 56만 5천여 명이었는데, 이와 대비했을 때 약 51%에 달하는 수가 참가한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경제성장률이 매우 높았다.
해방 직후 1946년의 공업생산이 44년에 비해 71.7%나 감소했었으나 1947~49년에 연평균 49.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해방 전의 공업생산수준을 상당부분 회복하게 된다.
-양문수, ‘분단 이후 남북한 경제의 궤적’, “현대사광장 제5호”, 2015,6.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0쪽.
불과 3-4년 만에 일본 통치의 ‘공백’을 완전히 메운 셈이다.
중요산업 국유화와 노동법령이 실제 노동자들의 증산 열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안나 루이스 스트롱이 소개한 인터뷰 자료도 있다. 살짝 엿보도록 하자.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29쪽.
새 노동법과 산업체의 국유화 조치는 북한 노동자들의 열성과 헌신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공장이 인민 소유임을 인식하였을 때 그들은 공장들을 복구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방적공장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을 복구하는 일에 거의 9천 시간을 자원봉사했다.
단천의 부두는 계획보다 거의 200일 앞당겨 재건되었다.
강선제강소에서 사람들은 지삼전과 이삼전이라는 두 노동영웅을 내게 소개시켜주었다.
그들은 작업장에 13일간 계속 있으면서 압연기를 멈추지 않게 했다.
“우리 조선인들 중에는 기술자나 숙련노동자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대신할 사람들을 훈련시킬 수 있을 때까지 일을 계속 할 겁니다.”라고 그들이 설명했다.
“해방 이후 생활 중에 제일 달라진 것이 무엇이지요?”
내가 제강소 노동자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토론을 하더니 세 가지로 대답했다.
“첫째, 이전에는 13시간 일하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8시간 노동하게 되었고 세상일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둘째, 이전에는 쌀밥을 못 먹고 콩깨묵을 먹었는데 이제는 750그램의 쌀배급을 받으며 더 나은 집에서 산다.
셋째, 이전에는 무슨 일에도 의견을 말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조합을 통해서, 그리고 선거를 통해 구성한 정부에 의해서 우리의 의사가 표현된다.”
이러한 것들이 북한의 노동자로 하여금 새 정권의 강고한 수호자가 되게 한 변화들인 것이다.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글 가운데 ‘5. 공장노동자들과 더불어’ 중에서
이외에도 이전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글에서 나왔듯이 “남녀 차별 없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여성노동자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줄 수 있었다.
참고기사 : [북한은 왜?] 북한에서 언제부터 연차유급휴가가 도입되었을까? ④ 615tv.tistory.com/145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