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1.

국유화 법령 발표 모습.

산업, 교통운수, 체신(우편),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

1946년 8월 10일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민을 노예화하며 대륙의 다른 나라 령토를 강점하고 그 나라 인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군사적 기지와 경제적토대를 닦을 목적으로 조선을 강점하고 36년동안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다.

일본강점자들은 조선에서 식민지통치를 시작한 첫날부터 조선의 경제를 자기의 제국주의적 리해관계에 예속시켰고 조선인민의 고혈로 많은 기업소, 발전소, 철도 등을 건설하였다.

조선이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조선인민에게 민주주의적자유를 보장하고 조선인민의 공사유재산을 보호하며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빨리 부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조성되였다.

조선인민을 착취하고 조선의 자원을 일본으로 빼앗아갈 목적으로 일제가 조선에 건설한 모든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등은 반드시 조선인민의 소유로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발전과 조선인민의 생활향상에 이용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법령을 발포한다.

일본국가와 일본 법인 및 사인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족반역자의 소유로 되여 있는 모든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 등을 모두 무상으로 몰수하여 이를 조선인민의 소유로 즉 국유화한다.

본 법령은 발포한 날부터 효력을 가진다.

 

 

 

4) 노동자들의 삶

 

그렇다면 국유화 및 노동법령 발표 이후 이북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947년 미국작가 안나 루이스 스트롱이 이북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작성한 기사다.

스트롱 작가는 당시 해방 후 3년 만에 수만의 노동자들이 국가가 운영하는 여름별장에서 휴일을 보내고 있다면서 놀라움이 가득 담긴 글을 작성했다.

 

 

*아래는 찰스 암스트롱 지음, 김연철·이정우 옮김, “북조선탄생”, 서해문집, 2006년, 147~150쪽.에서 거의 인용함.

 

노동자들이 이용한 휴양소들은 과거 일제 강점기 때 관료들이 쓰던 여름별장들이었다.

1946년 12월 19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본국, 일본인 조직, 일본인 그리고 과거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소유한 모든 온천, 공원, 해변 등”을 몰수할 것을 결정한 후 노동법령 이행을 위해 여름별장들을 모두 노동자들을 위한 휴양소로 바꿨다.

1948년 5월 당시 휴양소는 직업에 따라 북한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사회보건성이 집계한 휴양소의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해방 직후 3년 만에 “조선 근로대중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2만 여 개의 휴양소가 꾸려진 것이다.

가장 먼저 세워진 휴양소는 함경도지역이었다.

휴양소의 소장들은 1947년 5월 24일에 선출되었고 1947년 6월 7일부터 휴양소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휴양소에서는 연주단과 도서관을 만들고 하이킹, 관광, 소풍, 수영, 그리고 체육대회 등을 조직했다.

이렇게 하여 1947년 중엽 85개의 휴양소에서 총 2만 5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휴가를 보내게 된다.

안나 루이스 스트롱이 노동자들과 직접 인터뷰를 한 내용도 “기행 : 북한, 1947년 여름”의 ‘5장. 공장노동자들과 더불어’에 담겨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새 노동법은 1946년 6월 24일 통과되었는데 이는 산업시설들이 국유화되기 약 6주전이었다.

그 법에서는 1일 8시간 노동(위험부담이 있는 경우에는 7시간)과 일반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연간 2주, 청소년 노동자나 위험 업종 근로자들에게는 1개월간의 유급휴가를 규정하고 있었다.

새 법은 미성년자 노동을 금하였으며, 동일 작업에 대해서는 동일보수를 여성에게 주도록 하였으며, 안전수칙을 도입하였다.

사람들이 가장 고마워한 것은 사회보장이었다.

이는 1947년 1월부터 시행되었는데 거의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6월까지 무료의료혜택을 받았다….

많은 노동자 가족들이 노조를 통해 새 집을 제공받았다.

이전에 일본인들이나 감독‧기술진이 소유했던 가옥들이 노동자들에게도 할당되어 특별한 기록을 가지고 있거나 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다.


내가 인터뷰를 요청하였을 때 수줍음을 타면서도 침착한 몇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내 방으로 왔다.

둘은 함흥 방직공장의 직조공들이었고, 한 사람은 평양 견사공장에서 온 젊은 방적공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15세의 고아로, 12세도 안 되어 보였는데 공장 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하루에 6시간을 공장에서 일하고 두 시간은 공장의 학교에 나간다고 했다.

서른여섯 살 먹은 여성은 무늬있는 흰 명주옷을 입고 있었는데 얌전하게 앉아서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와 대담하는 것은 뒷순서로 미루어두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전형적인 가정주부처럼 보여서 그녀를 관리나 기술자의 아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직업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저는 금광 광부예요. 지하 100미터에서 작업을 하죠. 숙련기술자랍니다. 제가 착암기를 작동시키죠.”

“무겁지 않아요?”

그녀는 미안해하는 미소를 짓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에전에 하던 일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일제치하에서 저는 광석을 싣고 그 수레를 미는 일을 했어요. 하루에 13시간 또는 그 이상 일을 했지요. 지금은 압축공기 착암기를 작동시키는 일을 하지만 하루 7시간만 일하고 보수도 많이 받고 있어요.”

그녀의 이름은 이매화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광산에서 일해왔다.

그러나 일제치하에서 착암기 기술자로 일해본 것은 1년뿐이었다. 일제 때는 여성들이 고도의 기술을 배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떻게 그 자리를 얻었어요? 남자 대신이었습니까?”

“생산규모가 확장되고 제가 이 일에 대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일제 때는 광산에 노동자가 천 명뿐이었는데 이제는 2,500명이 일해요.”

그녀의 말로는 2,500명 중 206명이 여성인데 그들 가운데 오직 둘만이 착암기 기술자라고 했다.

이매화가 최초로 그 일을 맡았다. 그녀는 자기 보수도 자랑했다. 남편의 2배를 받는다고 했다.

남편도 같은 광산에서 일하는데 지상 근무를 하며 한 달에 2천 원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저는 4천 원씩 받아요. 요새는 같은 일을 하면 여자도 같은 보수를 받는 데다가 제가 하는 일은 숙련노동이거든요. 저는 기록도 많이 세웠어요. 이전의 착암기술자는 하루에 광석을 한 수레씩 캤는데, 저는 한 번은 하루에 스무 수레의 광석을 캤거든요. 제가 캐는 광석을 다 싣는데 4명 내지 6명의 노동자가 필요하죠.”

“당신 집에선 당신이 가장이겠어요.”

“제 남편 말이 바로 그거예요.” 그녀는 우쭐해하며 대답했다.

“남편이 시기하지는 않나요?”

“아녜요. 자랑스러워하죠.” 그녀는 내게 장담하였다.

나는 그녀의 생활수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남편과 그녀가 버는 6천 원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가였다.

일제 때는 식량사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이제는 남편과 제 몫으로 각각 1일 750그램씩의 쌀을 배급받지요. 우리는 둘 다 1급 노동자인 셈이에요.”

배급되는 쌀의 값은 킬로당 5원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족이 버는 6천 원 가운데 쌀값으로 나가는 비용은 월 230원에 불과하다.

“집도 좋아요. 이전에 일본인 관리가 쓰던 집이에요. 온돌로 되어 있지요. 큰 방이 둘 있고 작은 방이 4개, 그리고 마루가 작은 게 하나 있어요.”

“일본 지배 시절, 지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을 가져본 적이 있어요?”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흰 명주옷을 쓰다듬으며 “전혀 없었죠.”라고 대답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