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3.

윤석열 정권 들어 ‘부활’한 뉴라이트가 민족과 역사를 부정하는 친일매국 논란의 중심에 있다. 주권연구소와 자주시보는 뉴라이트의 실체를 해부하는 글을 연재한다.

 

 

미국 네오콘과 뉴라이트

 

 

▲ 미국 국기인 성조기.


‘새로운 우파’를 뜻하는 뉴라이트(New Right), 네오콘(Neo Conservative·신보수파)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에 등장했고 1980년대 들어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같은 시기에 등장한 뉴라이트와 네오콘은 사상, 정책적 측면에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갈래라고 볼 수 있으며 위기에 빠진 기존 보수진영을 대체하겠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이 가운데 미국에서 네오콘이 등장한 배경은 1960년대 말엽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로 몰리며 위기감이 높아진 것과 관련이 있다. 

미국에서 네오콘이 기존 보수진영을 밀어내고 권력까지 잡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60~1970년대 베트남전쟁에서 패배로 몰린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미국은 세계 최강’이라는 믿음이 무너졌고, 더 이상 미국이 전쟁을 벌여선 안 된다는 반전·평화 여론이 거셌다.

이 와중에 미군 철수로 베트남전쟁을 끝내기로 북베트남과 합의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하야했다.

같은 시기 진보·좌파진영을 중심으로 흑인, 여성 차별 철폐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미국 보수진영에서는 미국 사회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짙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절한 진보 성향 학자들, 정책을 만드는 싱크탱크와 시민운동세력이 중심이 돼 네오콘 활동을 했는데 이들을 편의상 ‘1세대 네오콘’으로 부른다.

원래 변절하기 전의 네오콘 인사들 사이에서는 인종 차별 철폐를 지지하는 한편 ‘미국이 힘을 통해 세계에 도덕을 구현해야 한다’는 모순된 믿음이 있었다. 

그랬는데 미국이 막대한 무력과 물자를 들였는데도 북베트남에 패배하자 반공과 반소련, 군사 개입을 지지하는 노선으로 급속히 돌아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네오콘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학자인 어빙 크리스톨은 자신을 비롯한 진보·좌파진영 인사들의 변절을 두고 “현실 세계를 배워 가면서 눈을 뜨게 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달의 책 한페이지] 네오콘 - 팍스 아메리카나의 전사들」, 월간조선, 2003.11.8.)

1980년대 들어 네오콘은 외교·안보 부문과 정치권으로 영향력을 키우고 권력도 잡았는데 이들을 ‘2세대 네오콘’이라고 부른다.

네오콘은 겉으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이상적 가치로 앞세웠으나 실제로는 약육강식과 힘의 논리에 따라 미국 중심 세계 질서를 전 세계에 강제로 이식시키는 ‘제국주의’를 지향했다.

이와 관련해 네오콘의 기관지인 ‘위클리 스탠더드’의 편집장이며 이론가인 윌리엄 크리스톨(어빙 크리스톨의 아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네오콘)를 제국주의자라고 부르길 원한다면 그것도 괜찮다”라고 인정한 바 있다. (「미국, 무력 써서라도 민주주의 ‘강제이식’」, 한겨레, 2005.1.18.)

로널드 레이건 정권(1981~1989년)을 차지한 네오콘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를 앞세워 그라나다를 침공하고 니카라과의 친미 반군을 지원하는 등 미국에 맞서는 나라의 정권을 전복했다.

그리고 공공기관 민영화와 대기업 위주 시장 질서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앞세워 미국 중심 경제 질서를 세계에 강요했는데, 1990년대 들어 미국의 맞수였던 소련이 해체된 뒤 네오콘의 이런 움직임은 한층 본격화했다.

조지 부시 정권(2001~2009년)에서도 요직을 꿰찬 네오콘은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하며 이라크전쟁을 일으켰고 대북, 대이란 적대 정책으로 중동지역과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를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미국의 네오콘과 한국의 뉴라이트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국내에서는 2004년 노무현 정권 들어 움직임을 본격화한 뉴라이트가 네오콘의 후속편이자 축소판이며 뉴라이트의 등장은 한국 정치의 미국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본래 진보를 지향하던 학계의 변절자들이 주축이 됐고, 힘의 논리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네오콘과 뉴라이트의 사고방식이 같기 때문이다.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의 정상호 박사는 네오콘과 뉴라이트가 절대적 선악 개념(네오콘)과 반공주의(뉴라이트)라는 ‘피아 이분법’을 공유하면서 사회, 경제 정책에서는 ▲작은 정부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 ▲복지의 시장화 등 신자유주의 기조를 동일하게 내세웠다고 분석했다. (정상호, 「미국의 네오콘과 한국의 뉴라이트에 대한 비교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제42집 제3호, 2008, 167~189쪽.)

한국의 뉴라이트세력이 미국의 일극적 세계 질서와 이라크 침략, 한미동맹 강화, 영어 공용화론, 대북 흡수통일 등을 일방적으로 옹호했으며 이러한 뉴라이트의 사고방식은 “미국의 패권적 세계관을 완벽하게 수용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뉴라이트 등장의 사회역사적 배경 <기획Ⅰ> 뉴라이트 들여다보기②」, 통일뉴스, 2006.5.10.) 

민중의소리는 2005년 6월 7일 보도에서 “네오콘이 세계 최강 대국이라는 미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이념을 실현할 물리력을 갖춘 반면, 뉴라이트는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한국에서 네오콘식 이념을 내놓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한국 수구보수세력이 자신들의 이념이 무엇이건 간에 미국에 아부 굴종하면서 성장해 왔듯이, 뉴라이트 역시 네오콘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려 하고 있다”라며 “뉴라이트의 모든 주장에서 네오콘과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고 짚었다.

네오콘은 ‘적’의 위협을 부각하며 힘으로 적을 제압해야 한다는 논리로 기존 보수진영을 대체해 권력도 잡았는데, 이러한 기조는 미국의 입김이 강한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수구세력의 한계

 

 

국내에서 뉴라이트의 등장은 수구세력의 한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곳곳에서 민주화 항쟁이 분출하고 냉전이 끝나가는 가운데 반공과 국가주의를 앞세운 군부 독재세력과 이에 영합한 기득권세력이 설 자리를 잃어갔다.

전두환 신군부를 이은 노태우 정권조차도 이러한 분위기에 떠밀려 남북 협력과 대화를 추진하는 북방 정책을 추진하는 등 대북 적대 정책의 기조를 완화했다.

노태우 정권마저 기존의 반공과는 결이 다른 대북 정책을 펼치자 권력을 잡아 온 수구세력의 위기감은 나날이 증폭됐다.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고 2000년 열린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으로 6.15공동선언이 채택되자 통일·평화·민족 화합의 분위기가 높아졌고, 기존 수구세력은 더더욱 수세에 몰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반공을 앞세워 활동하던 수구단체에 주던 지원을 줄였고 활동력이 떨어진 수구단체의 입지도 나날이 축소됐다.

임혁백 당시 이화여대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 수구세력의 처지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 그들에게 지난 10년은 국가권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시민사회 내에서도 헤게모니를 상실하였고, 마침내는 지역주의를 매개로 지켜온 마지막 보루인 의회 권력마저 빼앗긴 ‘상실의 10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당시 수구세력을 대표하는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잇달아 정권을 잃은 가운데 국민 사이에서 한나라당이 부패한 ‘차떼기 정당’이라는 인식이 높았고, 한반도의 탈냉전·화해 협력 흐름으로 반공 이념이 설 자리를 잃었다고 짚었다. 

마땅한 대안도 없이 선거에서까지 잇달아 진 수구세력에서는 “영구적인 패배”를 겪게 될 것이란 위기감이 팽배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좌파진영에서 변절한 뉴라이트가 틈을 노려 치고 나왔다는 것이다. (임혁백, 「한국의 뉴라이트 배경과 전망」, 『관훈저널』 겨울호 통권 93호 특집Ⅱ, 관훈클럽, 2008, 157~169쪽.)

뉴라이트는 진보·좌파진영이 한국의 역사를 일본에 의해 식민 통치당한 불행한 역사, 친일파 같은 기회주의세력이 득세한 역사로 잘못 규정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일제가 한반도에 개입한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가 이식한 자본주의, 철도와 도로 덕에 ‘식민지 조선’이 혜택을 받고 경제가 발전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뉴라이트의 핵심 주장이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인정하지 않고 한국의 힘으로 일군 산업화를 부정하는 등 진보·좌파진영이 ‘자기 비하’를 하고 있다며 뉴라이트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 전반의 역사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기존 군부 독재세력이 국가가 주도하는 반공·권위주의·정부주도형 경제성장·큰 정부를 지향했다면,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주도형 경제성장·작은 정부를 주장하며 ‘북한 인권 개선’, ‘북한 민주화’를 통한 흡수통일을 내세웠다. (전재호, 「2000년대 한국 보수주의의 이념적 특성에 관한 연구: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현대정치연구』 제7권 제1호(통권 제13호),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2014, 165~193.)

이처럼 뉴라이트는 기존 수구세력과의 차별성을 강조했으나 두 세력은 본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2004년 12월 2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들(뉴라이트)은 현재의 (노무현) 정권을 ‘반미 친북’이라고 질타한다. 여기에 대척적인 자리를 점하는 이들은 모르긴 해도 ‘친미 반북’을 지향한다고 보면 될 듯싶다”라면서 “이 같은 외교 정책 그 자체만 본다면 지난 반세기 한국 사회를 주도해 온 ‘그냥 라이트’와 아무런 다를 게 없다”라고 지적했다.

통일뉴스는 “(기존 수구세력과 뉴라이트가) ‘반북 신자유주의’를 공통적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궁극적 기치로 조국 선진(국)화를 치켜들고 있다. 결국 (뉴라이트는) 기존 수구보수세력의 논리와 하등 차이가 없는 ‘흘러간 레퍼토리’를 달라진 얼굴들을 내세워 리메이크해 들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뉴라이트, 어떻게 볼 것인가?, <기획Ⅰ> 뉴라이트 들여다보기①」, 통일뉴스, 2006.5.8.)

이를 통해 뉴라이트의 한계를 볼 수 있다.

(계속)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