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4년 02월 29일
기사 제목 : [아침햇살289] 북미 직접 대결, 미국이 패배한 날 ①
들어가며
북한과 미국은 80년 가까이 군사 대결을 이어왔다. 두 나라의 영토나 인구 등을 비교해 볼 때, 미국이 승리했을 것으로 생각할 법하다. 그런데 실제 벌어진 북미 간 직접 군사 대결에서는 대개 북한이 승리했다.
북미 직접 대결을 들여다본다.
죽미령 전투에서 처참하게 완패한 미국
한국전쟁 초기,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서 북미 간 첫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은 죽미령 전투에서 ‘완패’했다고 평가한다. 죽미령 전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 인민군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인민군의 진격에 놀란 미국은 선발대로 특수임무부대를 파견했다. 6월 30일,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가 일본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공항에서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들어왔다.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맥아더 휘하인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찰스 스미스 중령에게 오산 북쪽에서 인민군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스미스는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로 군인 훈장을 받은 인물이었다. 스미스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 7일) 당시 진지 방어의 공로를 인정받아 군인 훈장을 받았으며 과달카날 전투에서도 공적을 세우는 등 실전 경험이 많았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스미스 부대)의 대원은 6월 30일 부산에 먼저 들어온 ▲1대대 소속 본부 요원 일부와 B, C중대 ▲연대본부 4.2인치 박격포 소대, 7월 4일에 합류한 52포병대대 A포대까지 포함해 540명이었다. (육군본부,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 지연작전 재조명」, 『군사연구』 제122호, 육군군사연구소, 2006, 75-81쪽.)
스미스 부대 대원들 역시 주일미군 중에서 선별해 뽑혔다.
군사 전문 블로그 ‘공중전투’를 운영하는 김진용 씨의 글 「6.25 초기 미 34연대의 지연전」에 따르면 “21연대 1대대(스미스 부대)는 전쟁 전에 있었던 전투준비태세 검열에서 합격한 부대이고 대대장도 이름 있는 지휘관이었다. 사단 선발대로 뽑힌 것도 그래서였다”라고 한다.
또한 스미스 부대는 박격포, 무반동총, 대전차 화기인 2.36인치 바주카포 6문과 105밀리미터 곡사포 6문이 딸린 포병 1개 대대를 배속받았다. 대대급 규모로서는 상당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국방부 정책관실 미국정책과,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국방부, 2004.)
7월 5일 새벽 3시께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인민군의 진격을 대비했다. 죽미령은 경부국도와 철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주변에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거점으로 삼기 좋은 요충지였다.
특히 스미스는 죽미령에 진지를 꾸리기 전 두 차례 직접 지형 정찰에 나섰다. 스미스는 죽미령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수청리 일대를 포병 진지로 선정했다. 또 죽미령 곳곳에 기관총과 바주카포, 곡사포 등을 배치하도록 했다. (경인일보, 「오산 죽미령 전투 6시간 15분간 어떤일이 있었을까?」, 2020.6.6.)
스미스 부대 파견을 결정한 맥아더는 미군의 지상군이 투입됐다는 것만 알려져도 인민군이 알아서 도망치리라 여겼다고 한다. 죽미령 전투를 앞둔 스미스 부대의 자신감도 높았다.
전투 준비를 마친 스미스 부대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기다렸다. 7월 5일 아침, 인민군이 모는 T-34 탱크 8대가 나타났다. 스미스 부대가 인민군 탱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첫 미군 사망자가 나왔다.
인민군을 맞닥뜨린 스미스 부대는 75밀리미터 무반동총, 2.36인치 바주카포 등으로 인민군 탱크를 공격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군과 인민군의 사상 첫 교전으로 미군 사망자가 나왔지만, 전면전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탱크를 주축으로 한 인민군이 자신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는 스미스 부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인민군 탱크는 스미스 부대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남하해 진지 중앙에 있는 경부국도를 따라 죽미령을 통과했다. (육군본부,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 지연작전 재조명」, 『군사연구』 제122호, 육군군사연구소, 2006, 82쪽.)
이에 관해 스미스 부대에서는 “인민군이 우리를 못 알아봐서 그냥 지나갔다, 미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면 되돌아 갈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인민군이 자신들을 한국군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쳤다고 판단한 것이다. (위키백과 ‘오산 전투’ 항목)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 제4사단이 T-34 탱크 33대를 끌고 진격해왔다. 탱크의 후방에는 총 5,000여 명의 인민군 보병도 뒤따랐다. (위키백과 ‘오산 전투’ 항목)
인민군 탱크병들은 85밀리미터 포탄을 쏴 스미스 부대가 구축한 진지를 파괴했고 보병들도 가세했다. 스미스 부대는 전투 초반부터 수세에 몰렸다.
그러던 중 스미스 부대가 후방에서 쏜 105밀리미터 고폭탄에 맞아 인민군 탱크 2대가 멈춰섰다. 다만 스미스 부대의 ‘반격다운 반격’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미군의 오산전투」, 디펜스투데이, 2020.3.14.)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스미스 중령은 뒤늦게 철수를 결정했다. 급박한 철수 상황에서 스미스 부대 소속 B중대 2소대는 철수 명령조차 듣지 못했다. 2소대 소속 병사 상당수는 무기와 철모, 탄띠를 버리고 군복도 벗은 채 맨발로 줄행랑쳤다. 무작정 걷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서해안, 동해안까지 다다른 병사들도 있었다. 서해안에 도착한 병사 일부는 조각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한국전 첫 전투의 ‘악마적 선택’」, DBR, 2012.10.)
결과를 볼 때 스미스 부대는 죽미령에서 미리 대비해 지형상 우위를 점하고도 인민군에 패배했다. 미군의 희생이 무척 컸던 죽미령 전투는 미국의 국익에도 해가 됐다. (정다혜, 「1950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참전과 죽미령 전투」, 국민대학교, 2014.)
스미스 부대는 대원 중 150명이 전사하고 장교 5명이 실종, 82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위키백과 ‘오산 전투’ 항목) 한편으로는 스미스 부대가 받은 피해를 전사, 부상, 실종 등 181명으로 파악한 연구도 있다. (육군본부,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 지연작전 재조명」, 『군사연구』 제122호, 육군군사연구소, 2006, 83쪽.)
연구마다 스미스 부대가 받은 피해의 집계가 다른데, 미군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고 보는 점에서는 견해가 같다.
스미스 부대가 받은 피해는 인민군의 피해가 전사자 42명, 부상자 85명에 그친 점과도 비교된다. (육군본부, 「군사연구」 제122호, 2006, 83쪽.)
심지어 스미스 부대는 도망치면서 두고 간 장비 대부분도 인민군에 빼앗겼다. 죽미령 전투에서 완패한 스미스 부대의 처지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이후 죽미령 전투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천안, 대전, 옥천 전투 등에서도 미국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천안 전투에서는 인민군 탱크에 의해 34연대장 로버트 마틴이 숨졌다. 연대장을 잃은 34연대 병사들은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후퇴하기 급급했다. (육군본부,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 지연작전 재조명」, 『군사연구』 제122호, 육군군사연구소, 2006, 85쪽.)
대전 전투에서는 스미스 중령에게 방어를 당부한 장본인인 딘 소장(24단 사단장)이 철수 도중 인민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사단장이 전쟁 중 적에 붙잡힌 건 미군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미 24사단은 7월 21일 벌어진 옥천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죽미령 전투 이후 보름여 만에 1만 6,000명 병력 가운데 약 7,000명이 사망했다. (구자룡, 「죽미령에서 다부동까지 ‘피(血)로 버틴 지연작전’(1)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화정평화재단·21세기 평화연구소)
미국은 죽미령 전투에 관해 인민군의 진격 속 총 6시간 15분 동안이나 버텼다고 자평한다. 특히 맥아더는 죽미령 전투를 두고 인민군의 진격을 늦춰 미군이 전선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며 ‘성공한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40년 만에 다시 풀어보는 6·25의 수수께끼:4”」, 한국일보 1990.6.20.)
하지만 이런 주장은 ▲스미스 부대가 특수임무를 맡은 선별된 정예였다는 점 ▲죽미령 전투 이후 잇따른 전투에서도 미군이 패배했다는 점에서 군색한 변명으로 보인다.
맥아더에 이어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매슈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인민군의 전력을 잘못 판단했다고 평가했다. 맥아더에 비해 합리적인 평가로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국은 죽미령 전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올해 2월 1일(미국 현지 시각) 새뮤얼 퍼파로 인도·태평양 사령관 지명자 인준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서는 죽미령 전투를 비중 있게 다룬 책 『이런 전쟁(T.R. 페렌바크, 『This Kind of War: A Study in Unpreparedness』, 1963.)』이 화제가 됐다.
공화당의 댄 설리번 상원의원은 책을 들어 보이며 “(죽미령 전투 당시) 미군의 엄청난 희생은 당시 미국 (군 지도부 등의) 지도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자조했다.
『이런 전쟁』의 저자 페렌바크는 미국의 패배를 두고 싸울 준비가 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페렌바크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베트남과 무려 15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이후에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과 여러 차례 전면전을 벌였다. 특히 미국은 2021년 7월, 아프간에서 야반도주하듯 미군을 철수시켰다. 세계 주요 언론은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20년 동안 전쟁을 벌이던 미국이 패배하며 망신살을 뻗쳤다고 보도했다.
그런데도 미 정치권이 최근 청문회에서 콕 짚어 강조한 건 죽미령 전투였다. 이는 죽미령 전투에서의 완패가 미국에 ‘트라우마’로 각인됐음을 보여준다.
(계속)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