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3년 02월 26일
기사 제목 : [기획연재] ②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선인민군
지난 2월 8일은 북한의 조선인민군 창건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북한은 열병식을 비롯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였다. 북한의 군사력이 한반도는 물론 국제 질서에 미치는 영향이 날로 커가는 가운데 북한의 군대를 역사적으로, 학술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이에 주권연구소는 4회에 걸쳐 기획연재를 준비하였다.
차례
1. 김일성 주석과 조선인민군
2.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선인민군
3.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선인민군
4. 조선인민군의 3가지 특징
2.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선인민군
1)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인민군 현지지도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과 함께 1960년 8월 25일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탱크 사단(아래 105 탱크 사단)’을 현지지도한 것을 선군영도의 출발로 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 현지지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위 부대에 관하여 알아야 한다.
김일성 주석은 해방 후 인민군을 창건하면서 “현대전에서 탱크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의 중요성을 깊이 통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함께 했던 류경수에게 전차부대 건설을 맡겼다. 그렇게 류경수 여단장이 이끄는 북한의 첫 전차여단이 탄생하였다. (「땅크사단에 남기신 선군령도의 첫 자욱」, 노동신문, 2007.2.8.; 이계환, 「‘탱크사단 현지지도는 선군영도의 첫 자욱’」, 통일뉴스, 2007.2.8.에서 재인용)
이 전차여단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3일 만에 서울에 진입해 서대문형무소와 방송국을 점령하고 중앙청에 북한 국기를 게양하였다. 이에 1950년 7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54호에 의해 ‘근위 서울 제105 탱크 사단’으로 승격하였고 2001년 5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제0089호에 의해 지금의 이름인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탱크 사단’이 되었다.
이처럼 105 탱크 사단은 북한에 있어 현대적 무장의 상징이자 기계화 부대의 대표, 인민군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최고지도자들은 이 부대를 자주 현지지도하였으며 이는 단순한 군사 활동을 넘어 정치·외교적 의미까지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 이후 첫 공식 활동으로 2012년 1월 1일 105 탱크 사단을 현지지도해 선군정치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내외에 분명히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첫 105 탱크 사단 현지지도에서 김일성 주석이 “인민군대의 강화발전에서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강령적 지침”을 밝혀주는 모습을 보며 김일성 주석이 개척한 “선군혁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굳은 결심”을 다졌고 김일성 주석을 “목숨으로 사수”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노동신문, 앞의 글)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105 탱크 사단 현지지도의 의의를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김일성 주석의 선군사상과 선군영도를 높이 받든 보좌 활동이었다는 점이다.
1960년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8세로 김일성종합대학 1학년 시절이다. 일찍부터 김일성 주석의 군사 활동을 보좌했음을 알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때부터 1991년 최고사령관에 임명될 때까지 인민군 부대를 2천여 단위나 현지지도했다고 한다. (탁진 외, 『김정일지도자 4』, 평양출판사, 1998, 42쪽.)
다른 하나는 “인민군대를 수령 옹위의 주력군으로 강화·발전시키는 데서 나서는 강령적 지침과 무장 장비의 현대화, 사회주의 건설에서 인민군대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밝혀준 것”이다. (노동신문, 앞의 글)
당시 현지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현지지도를 지켜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지도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한의 기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학생 시절에 이미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저술 및 지도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군사 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활동이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첫 105 탱크 사단 현지지도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군영도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1962년 12월 노동당 중앙위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국방 병진 노선’이 결정된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국방 병진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국방 부문 현지지도를 강화하였고 이에 김일성 주석을 보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긴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선군영도를 한 것이다.
이 시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영도에서 중요한 지점은 인민군 내에 ‘유일사상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1963년 2월 6일 대덕산 초소를 현지지도하며 ‘일당백’ 구호를 제시하였을 때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들’이 반대하자 “이 자들의 책동을 단호히 짓부수고 (‘일당백’을) 인민군대가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적 구호로 제정”했다고 한다. (「북에서 ‘일당백’ 구호가 나오게 된 배경」, 한겨레, 2001.6.14.)
또 군부대 안에 군벌관료주의가 발생하자 1969년 1월 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제4차 전원회의를 보고서 준비부터 결정서 작성까지 직접 챙기며 노동당의 정책을 이행하지 않고 군벌관료주의를 행한 이들을 실각시켰다고 한다. (이찬행, 『김정일』, 백산서당, 2001.)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69년 1월 19일 노동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및 인민군 총정치국 일꾼들과 한 담화 「인민군대 당조직들과 정치기관의 역할을 높일 데 대하여」에서 “인민군 당위원회 전원회의는 인민군대의 당의 유일사상 체계를 튼튼히 세우고 인민군대에 대한 당의 영도를 확고히 보장하며 군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라고 하면서 인민군 내에서 유일사상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1975년 1월 1일 인민군 총정치국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 「전군을 김일성주의화 하자」를 발표해 ‘전군 김일성주의화’ 방침을 제시하였고 1979년 2월에 ‘전군 주체사상화’ 방침을 거듭 제시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군사 작전도 직접 지도하였다. 북한은 1960년대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범한 예지와 탁월한 영군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들”이 나타났다고 소개하였다.
첫 번째는 1968년 1월 23일 발생한 푸에블로호 사건이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이 항복서를 내기 전에는 푸에블로호 선원(승무원)들을 절대로 석방하지 않을 것”이라며 “항복서를 낸다 해도 푸에블로호는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대응 방향을 정했다. 그러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먼 훗날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후대들에 ‘이것은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빼앗은 간첩선’이라고 말해주겠다”라고 하였다. (「김정은 3대째 자랑...‘미국의 항복서’」, 중앙일보, 2018.1.17.)
두 번째는 1969년 4월 15일 발생한 EC-121기 격추 사건이다. 1968년 11월 이후에만 8차례나 미국의 EC-121기가 북한을 정탐하자 1969년 3월 김일성 주석은 영공을 침범하는 EC-121기를 격추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관련 부대 지휘관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하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69년 들어 발생한 두 차례의 EC-121기 영공 침입에 관해 보고받고, 향후 영공 침입에 대비한 작전 수립과 “간첩 비행기가 다시금 공화국 영공에 날아들면 즉시 우리 비행기를 출동시켜 쏴 떨굴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김차준, 「EC-121기 사건과 미국의 한반도 위기에 대한 대응」, 『통일정책연구』 제31권, 통일정책연구원, 2022.)
이처럼 이미 1960년대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을 보좌해 군사 작전을 직접 지도했음을 알 수 있다.
2) 인민군 최고사령관 임명
1980년 10월 10~14일 진행된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위원으로 선출됐다. 군 관련 첫 당직이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1차 전원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중앙인민위원회(지금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산하에서 독립시켜 확대 격상하였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국가기관 직책이 군사 부문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1년 12월 24일 노동당 중앙위 제6기 제19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의 제의로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되었다.
당시 헌법(1972년 개정) 제6장 제9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되며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즉, 인민군 최고사령관은 국가 주석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김일성 주석이 최고사령관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넘겨준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다음 날 조선인민군 중대 정치지도원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내가 이제는 팔십 고령이므로 최고사령관으로서 밤을 지새우며 전군을 지휘하고 통솔하기 곤란”하여 “이제부터 나는 당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고문의 역할을 할 것”이며 “전체 인민군 장병들이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나의 명령과 같이 여기고 그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최고사령관의 영도를 충성으로 높이 받들어 나갈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다. (「인민군대 중대 정치지도원들의 임무에 대하여」, 『김일성저작집 43』,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261~272쪽.)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배경에는 1960년대부터 인민군 부대를 2천여 단위나 현지지도하는 등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왕성한 선군영도가 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인민군대의 영도자로서 전체 인민군 장병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흠모”를 받았으며 “그때 인민군 지휘 성원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을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최고사령관으로 대하고 받들어 모시었다”라고 한다. (최금춘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선군문답: 선군정치는 어떤 력사적과정을 통하여 확립되였는가」, 우리 민족끼리, 2009.7.16.; 이계환, 「‘선군정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北사이트>」, 통일뉴스, 2009.7.16. 재인용)
이후 1992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3차 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해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장을 국가 주석에서 분리하였으며 국방위원회를 국가 주권의 최고 군사기관으로 규정(제111조)하였고 국방위원장이 일체 무력을 지휘 통솔하도록 규정(제113조)하였다. 또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처음으로 국방위원장에 선출하였다. 4월 20일에는 원수 칭호도 수여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서 당(총비서), 정(주석), 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군의 지위를 가장 먼저 승계한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사령관이 된 후 전 세계를 긴장시킨 명령이 1993년 3월 8일 나왔다. 최고사령관 명령 0034호 ‘전국, 전민, 전군에 준전시 상태를 선포함에 대하여’다. 전체 내용은 아래와 같다. (출처: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미 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도당이 침략적인 팀스피릿 ’93 합동군사연습을 벌임으로써 우리나라에는 임의의 시각에 전쟁이 터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음. 우리 인민은 투쟁을 바라지 않지만 자기의 존엄을 유린당하면서까지 평화를 구걸하지 않을 것임. 만약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이 새 전쟁을 도발한다면 우리 인민과 군대는 당과 수령, 우리식 사회주의를 위하여 끝까지 싸울 것임. 나는 새 전쟁 도발 책동으로 조성되고 있는 엄중한 정세에 대처하여 공화국과 인민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로서 다음과 같이 명령함.
1. 전국·전민·전군이 1993년 3월 9일부터 준전시 상태로 넘어갈 것.
2.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부대들과 인민경비대,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전체 대원들은 원수들이 언제 어느 때 덤벼들어도 일격에 소멸할 수 있게 만단의 전투 동원 태세를 갖출 것.
3. 전체 인민들은 한 손에는 마치와 낫,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사회주의 경제건설에서 일대 앙양을 일으킬 것.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당시는 북미 사이에 핵문제로 전쟁 위기가 치솟던 때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특별사찰을 요구하였고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전략폭격기 등을 대거 동원한 팀스피릿 한미연합훈련을 재개하였다.
이에 북한은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였다. 이후 각지에서 군중대회, 궐기 모임이 진행되었고 10일 남짓한 기간에 150만 명의 청년·학생이 입대, 복대를 탄원하였다고 한다. 북한은 연이어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성명도 발표하였다.
결국 미국은 특별사찰을 포기하였다. 한국 정부는 3월 19일 시급히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선생을 송환하였다. 준전시 기간이었지만 북한 전역에서는 리인모 환영 열기로 들끓었다.
연합뉴스는 1993년 3월 19일 자 보도 「팀스피리트 훈련 결산」에서 “훈련실시를 둘러싼 북한의 「저항」과 반발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미 양국이 그동안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연계 카드로 활용해온 팀스피릿 훈련이 대북 카드로서는 한계에 봉착했지 않느냐는 분석도 가능케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팀스피릿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라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훈련에 비판적 논지를 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최고사령관이 된 후에도 인민군 강화를 위한 여러 조치를 하였다. 그중 하나는 1996년 1월 1일 제안한 ‘오중흡 7연대 칭호 쟁취 운동’이다. 오중흡 7연대란 항일무장투쟁 시기 “일본군을 유인, 사령부를 보호하고 주력부대를 압록강 연안까지 무사히 도달케 했다는 빨치산 부대이며 당시 7연대를 지휘한 오중흡은 북한에서 ‘수령 결사옹위 정신’을 발휘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北 ‘7연대칭호 쟁취운동’과 ‘군민일치운동’」, NK조선, 2002.2.13.)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군대와 민간이 서로 도우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군민일치’ 운동도 펼쳤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국의 협동농장·공장·기업소 등이 군인들을 위하여 위문물자를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군부대가 건설 현장이나 건설 토목공사에 참가하여 민생부문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한은 1992년 3월 18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군민일치 모범군(시·구역)’ 칭호를 제정하였으며 군대 지원사업에서 모범을 보인 기관·기업소·학교 등에 최고사령관 명의의 감사문을 전달하였다. 이 운동은 훗날 ‘군민일치모범군 쟁취운동’으로 제도화되었다. (이찬행, 『김정일』, 백산서당, 2001, 644~645쪽.)
3)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선군정치
선군정치란 “군사를 제일 국사로 내세우고 인민군대의 혁명적 기질과 전투력에 의거하여 조국과 혁명, 사회주의를 보위하고 전반적 사회주의 건설을 힘있게 다그쳐 나가는 혁명 영도방식이며 사회주의 정치방식”이다. (『김정일 선집』 제15권, 조선로동당출판사, 2005, 352~353쪽.; 황지환, 「선군정치와 북한 군사부문의 변환전략」, 『국제관계연구』 제15권 제2호,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 2010, 106쪽에서 재인용)
국내에선 흔히 선군정치를 1990년대 중후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지키기 위해 제기된 임시 조치, 생존 전략 정도로 이해한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도 선군정치 항목에서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이 군을 앞세운 선군정치를 펼친 것은 예외적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60년부터 이미 선군영도를 시작한 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헌법 개정을 통해 선군정치의 법적 토대를 만든 점을 고려하면 환경 변화에 따라 급하게 임시 조처를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선군정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혁명의 주력군’을 새롭게 규정하는 전략적인 문제라고 북한은 설명한다. 즉, “혁명적 기질과 전투력”으로 볼 때 군대가 “조국과 혁명, 사회주의를 보위하고 전반적 사회주의 건설”을 하는 주력군이라는 것이다.
선군정치에 따라 북한에서 군대는 국방은 물론 경제 건설에도 앞장서며 나아가 시대정신(‘혁명적 군인정신’)을 만들고 문화(‘혁명적 군인문화’)까지 창조하는 말 그대로 ‘주력군’이 되었다. 여기서 ‘혁명적 군인정신’이란 최고사령관 명령이라면 끝까지 수행하는 결사 관철, 무조건 집행 정신이며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기 한 몸을 바치는 자기 희생정신, 영웅적 투쟁정신”이다. (김용현 외, 「‘고난의 행군기’ 북한 군대의 사회적 역할 연구」, 『인문사회과학연구』 제17권 제2호,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16.)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군정치 노선을 구현하기 위해 무려 2,150여 개의 부대와 최전방 초소를 방문하였다. 이는 “육군으로 치면 16개의 군단 사령부, 26개의 사단 사령부, 41개의 여단 사령부는 물론 모든 연대 사령부를 방문하고 대대 수준의 주둔지까지 방문”한 셈이다. (김기협, 「북한의 ‘선군정치’ 호전성으로 이해한다면…」, 프레시안, 2014.8.11.) 그만큼 군인이 주력군으로 제 역할을 하도록 격려하고 지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농업, 전력, 석탄, 철도운수, 건설 등 경제 핵심 분야에 투입된 군대는 북한 경제를 살려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1998년에 들어서면서 ‘고난의 행군’ 종료를 선언했다. 실제로 한국은행의 추정에 따르면 “1990년대 초에 시작하여 1998년에 절정에 달한 북한경제의 위축은 1999년에 일단 멈추었으며, 북한의 GDP는 1999년 이후 2005년까지 7년 연속 플러스 성장”을 했다고 한다. (양문수 외, 「2000년대 북한경제 종합평가」, 산업연구원, 2012.)
인민군은 경제 건설을 위해 아예 전문 부대를 만들었다. 북한 국방성 군사건설국 아래 도로건설군단, 총참모부 공병국 아래 공병군단 등이 그것이다. 원래 군사 도로 건설을 수행하는 부대이지만 민간 경제의 각종 건설 현장에도 투입된다. 인민군 건설여단은 상당한 숫자를 보유하고 있다. 국방성 아래의 도로건설군단은 128만 명의 정규군(총참모부 관할)에 포함되지 않는 별도의 40여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총참모부 아래의 전문 건설부대는 정규군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영구, 「북한의 ‘선군’ 체제...북한군은 어떤 일들을 하고 있을까?」, 프레시안, 2021.6.25.)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강원도 안변군의 유역변경식 발전소인 안변청년발전소를 인민군에 맡겨 사회주의 건설에서 모범을 만들도록 했다. 안변청년발전소는 1996년 9월 1단계 공사를 마무리하고 같은 해 12월 2단계 공사에 착수, 3년 10개월 만인 2000년 10월 준공했다고 한다. 1996년 6월 1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전소 건설 현장을 찾아 군인들의 물길 굴(수로터널) 공사 결과를 호평하였고 같은 달 30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전신명령’을 통해 건설에 참여한 군인과 건설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같은 해 8월 7일에는 발전소 건설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선물과 표창을 하였다. (김용현 외, 앞의 글) 이후 인민군은 임남·신명·전곡의 대규모 댐과 여러 개의 발전소를 세웠다고 한다.
인민군의 건설 사례에서 희천발전소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희천발전소는 당초 2001년 3월에 첫 삽을 떴지만 8년 동안 공사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2009년 3월 김정일 위원장이 공사 현장을 찾아 ‘강성대국 원년인 2012년까지 희천발전소 건설을 완공하라’고 지시한 뒤 7차례나 더 현지지도를 하며 인민군 건설자들을 독려했다. 이를 계기로 공사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를 “선군정치의 기초인 혁명적 군인정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천리마 속도, ‘희천 속도’”라고 명명했다. ‘희천 속도’는 강성국가 건설의 상징적 용어가 되었다. (「北김정일, 자강도 희천발전소 건설장 시찰」, 연합뉴스, 2009.9.18.)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방 부문의 컴퓨터 수치제어(CNC) 공작기계 기술을 민간 경제로 이전하는 ‘혁명적 변화’를 통해 ‘새 세기 산업혁명’을 추진하였다. 북한은 CNC 기술이 ‘고난의 행군’을 극복할 수 있었던 ‘자력자강의 결정체’였다고 주장한다. (정태연, 「김정일 시대 ‘선군경제건설노선’ 연구: ‘국방건설’과 ‘경제건설’의 상관성」, 『현대정치연구』 제14권 제2호, 2020, 186쪽.)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는 이후 김정은 시대를 여는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