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8.


북한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제8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승리와 영광의 대축전”으로 “성대히 경축”하겠다고 하였다.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주권연구소와 자주시보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획연재를 10회에 걸쳐 준비하였다. 

 

 


 

 

 

 

4. 김일성 주석의 자주외교, 비동맹외교

 


비동맹운동과 북한의 자주노선

흔히 냉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크게 충돌했던 치열한 대결의 시대로 기억된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속한 나라들을 제일(1)세계, 소련을 대표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에 속한 국가들을 제이(2)세계로 일컬었다.

그런데 그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걷는 나라들도 있었다. 주로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에 속한 이들 국가를 제삼(3)세계라고 불렀다. 제삼세계 국가들은 나라의 규모, 인구, 경제력, 군사력과 상관없이 국가 간 대등한 관계를 촉구하며 특정 강대국 동맹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입장에서 국익을 지키려는 노선을 표방했다. 

제삼세계 국가들은 196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제1차 비동맹정상회의를 열어 비동맹운동을 출범하였다. 당시 25개국으로 출발했지만 1983년 인도에서 열린 제7차 정상회의에는 100여 개국으로 늘어났다. 

북한이 처음부터 비동맹운동에 함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북한이 제일세계나 제이세계에 속한 것도 아니었다. 북한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래서 반미국가가 된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사회주의 국가면서 소련 진영에 들어가지 않은 건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이 왜 제이세계에 속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처음부터 비동맹운동에 가입하지 않았는지 그 배경을 지금부터 살펴보자. 

같은 사회주의 진영이라고 해도 국가별로 노선·방향성이 꼭 일치하지는 않았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전임자인 스탈린을 깎아내렸다. 이뿐만 아니라 흐루쇼프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론을 주장했다. 이는 사회주의 진영에 충격과 혼란을 불러왔다.

1955년 김일성 주석은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꼭 소련식과 같이 해야만 한다는 원칙은 있을 수 없다”라며 “어떤 사람들은 소련식이 좋으니 중국식이 좋으니 하지만 이제는 우리 식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주장했다. 이는 김일성 주석이 소련의 간섭을 거부하고 완전한 자주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응서, 「1960년대 중반 북한의 자주외교노선 채택에 관한 연구」, 『세계정치』 제16권,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2012.)

강만길 교수는 “대외적인 측면에서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사회주의권의 세계관과 혁명전략의 문제였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60년대 초는 사회주의권에서 흐루쇼프의 주도로 스탈린 격하운동이 계속되는 한편 중국과 소련 간에는 이데올로기 논쟁 및 국경분쟁이 발생하여 사회주의 진영 내에 균열과 갈등이 표면화된 시기였다. 흐루쇼프의 자본주의국가와의 평화공존노선과 스탈린체제에 대한 변화의 모색은 민족이 분단된 상태에서 자본주의국가들과 직접 대결하고 있던 분단국가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만길, 『한국사 21 : 북한의 정치와 사회』, 211쪽, 한길사, 1995.)

북한을 향한 소련과 중국의 내정간섭을 상징하는 대표 사건이 바로 1956년에 일어난 종파사건이다. 흔히 이 사건을 ‘8월 종파사건’이라고 부른다. 8월 종파사건은 북한 내 소련과 중국을 따르는 세력들이 정변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실각한 사건이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8월 종파사건’ 항목)

소련은 북한 내 소련파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북한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했다. 이런 가운데 또 다른 사회주의 대국인 중국도 북한 내 중국과 가까운 연안파 등을 내세워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흐루쇼프의 연설 이후 소련과 중국이 미코얀, 펑더화이를 북한에 보내 북한 내 소련파, 연안파를 통제하려 한 것이다. (김응서, 앞의 글)

이에 김일성 주석은 반사대주의 기치를 들었고 이른바 종파주의자들은 북한에서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됐다. 분명한 건 김일성 주석의 노선이 북한 내 영향력 강화에 나선 소련과 중국의 입김을 차단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소련, 중국을 적대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이 사회주의 국가들을 적대시하며 냉전을 펼치는 상황에서 북한은 주요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8월 종파사건을 마무리한 북한은 1961년 7월에 중·소 양국과 주권의 상호 존중, 내정불간섭, 평등한 관계를 보장하는 ‘우호 협조 및 호상 원조 조약’을 맺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중국의 속국 혹은 소련의 위성국이 되기를 거부했”으며 “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응서, 앞의 논문)

북한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단결해서 자본주의 진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기대와 달리 소련, 중국 사이의 갈등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의 공세와 이간질 앞에 쉽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 이 즈음 제삼세계 진영에서는 비동맹운동이 등장했다. 하지만 북한은 어느 군사동맹에도 들어가지 않은 자주적인 나라라고 스스로 여겼기에 굳이 비동맹운동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즉, 비동맹운동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가입하지 않고도 자주성을 유지할 것이므로 굳이 가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제삼세계 외교

비동맹운동은 처음부터 강대국의 간섭과 약탈을 거부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출발했기에 기본적으로 반제자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제국주의 진영은 비동맹운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경제협력을 미끼로 제삼세계 국가들을 반제자주 노선에서 이탈시키려 하였다. 이에 비동맹운동 내 노선갈등은 갈수록 커져갔다. 

김일성 주석은 제삼세계 국가들과 외교를 통해 비동맹운동 내 반제자주 노선을 강화하려 하였다. 또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중남미,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 강화하는 것에 많은 공을 들였다. 

김일성 주석은 1957년에, 베트남의 호치민 주석은 1958년에 각각 상대국을 방문하였다. 이후 북한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아세안 10개국과 모두 수교했다. 이와 관련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비동맹원칙을 견지하며 아세안을 중심으로 역내 평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형종, 「아세안-북한 관계와 한반도 평화」, 『DiverseAsia』 제1권, 2018.)

김일성 주석은 비동맹운동의 계기가 된 반둥회의 10주년을 기념해 1965년 4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 참석하였다. 인도네시아 방문 기간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를 강조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김일성 주석의 제삼세계 외교가 국제무대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은 당시 북한의 경제력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60~1970년대 북한의 발전상은 국제사회, 특히 대부분 개발도상국이었던 제삼세계에서 상당히 주목받았다. 당시 북한의 경제력에 대해 “1960년대 초반 서구 좌파 경제학자들은 북한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공업국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라는 분석도 있다. (김연철, 「남북한의 경제정책 비교: 대립에서 협력으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4.)

정용욱 서울대 교수는 제삼세계를 중심으로 외교 무대를 확대해나가는 김일성 주석의 행보와 관련해 “한반도에서 탈식민 과제 해결과 진영외교를 결합하거나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 국가들 이외의 지역·국가로 대외관계를 확대할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자 무대”라고 짚었다. (정용욱, 「6.25전쟁~1950년대 후반 북한의 평화운동」, 『역사와 현실』 제91권, 2014. 287쪽) 이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국제무대를 잘 활용했던 셈이다. 

노선갈등을 지속하던 비동맹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야겠다고 판단한 김일성 주석은 1974년 5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비동맹운동 정식가입 방침을 확정하였다. 마침내 북한은 1975년 8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외무장관회의(리마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비동맹운동의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리마회의에서는 ▲북한의 자주적 통일방침 적극 지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국 군대 철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 등의 내용이 담긴 리마강령이 채택됐다. 

같은 해 북한은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유엔사령부 해체 결의안을 통과시켜 자신의 외교력을 과시하였다. 제삼세계 국가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유엔총회에서 북한의 입지가 만만치 않음을 입증한 것이다. 미국과 전쟁도 하고, 소련·중국의 압력에 맞서기도 하면서 자주노선을 지켜온 북한은 제삼세계 국가들의 많은 기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1979년 제6차 쿠바 아바나 비동맹회의에서 조정위원국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81년 1월 12일 중앙일보는 「비동맹외교의 강화」라는 칼럼에서 “비동맹권에서 양적 다수를 차지하는 아프리카지역에서 한국은 수교국 수를 기준으로 북한에 39 대 28로 크게 뒤지고 있다”라면서 “아프리카와 비동맹외교에 우리가 뒤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쪽 외교가 어렵다는 말도 되겠지만 외교당국에서도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 자성해봄 직은 한 일이다”라고 짚었다. 이렇듯 국내 보수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도 한국이 북한의 외교에 밀리고 있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살펴볼 수 있다.

제삼세계 국가에 대한 외교와 관련해 북한이 국제무대에서 한국보다 비교우위를 보인 사례는 2021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류승완 감독)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는 유엔 가입을 둘러싸고 남북 간의 외교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소말리아가 북한의 손을 들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 소말리아가 북한 대사의 손을 들어준 건 오랜 기간 이어진 김일성 주석의 비동맹운동에 뿌리가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소말리아 사례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에도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외교활동에서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북한이 앞서 나갔음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개봉한 대중 영화에서도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북한의 상대적 우위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한 점을 눈여겨 볼만하다.

지금도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는 북한 노동자가 제작한 동상 등 김일성 주석의 비동맹 노선과 관련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모잠비크, 보츠와나 등으로 파견된 북한 예술가와 노동자들은 해당 국가에서 대통령 동상을 비롯한 기념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북한의 제3세계 외교…속내는?」, KBS, 2012.4.28.)

아프리카 각국에서 대통령 동상이나 기념탑 같은 한 국가로서는 중요한 기념물 제작을 북한에 맡긴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아프리카뿐 아니라 중남미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1960년대 들어 미국의 그늘에 있던 라틴아메리카에 반미·반독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비동맹운동의 물결이 번졌다. 

1961년 9월 12일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쿠바 인민혁명의 승리는 라틴아메리카에 민족해방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라며 “지금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그 주구들의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강력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도민, 「1948~1968년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 연구」, 서울대학교, 2020.)

북한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문화교류에 힘을 쏟았다. 

북한은 브라질, 베네수엘라, 칠레 등에 조선문화협회를 창립하는 등 라틴아메리카 각국과 문화교류에 나섰다. 노동신문은 한 베네수엘라 시인의 시를 번역해 지면에 실었다. (김도민, 위의 글.) 또 북한 출판계에서는 1963년부터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해 펴내기도 했다. (모순영, 「김일성 시기 북한의 대외문화교류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2014.) 

북한은 1959년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쿠바와의 외교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60년 12월 쿠바의 혁명지도자 체 게바라가 쿠바 정부 경제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북한을 찾았다. 1960년 12월 3일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쿠바 대표단 환영연회에서 “쿠바혁명의 승리가 라틴아메리카와 전 세계 민족해방운동과 평화 위업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김도민, 위의 글.)

북한과 쿠바의 각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도 있다. 

1960년대 후반에는 피델 카스트로 쿠바 공산당 총서기가 북한 대사관을 시시때때로 찾았다. 조선중앙TV에 따르면 카스트로 총서기는 장정환 쿠바 주재 북한 대사와 자주 담소를 나눴고 “김일성 동지는 나의 둘도 없는 벗이고 당신은 그의 부하이므로 우리는 뜻도 배짱도 통하는 친우”라고 강조했다. 이는 김일성 주석이 미국의 위협으로 어려움을 겪던 쿠바에 전폭 지원을 약속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도는 전한다. 장정환 대사의 가족을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들도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쿠바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北 TV, 1960년대 쿠바와 우호관계 부각…왜」, 연합뉴스, 2013.7.19.)

이후 1986년 3월 김일성 주석은 평양에서 카스트로 쿠바 공산당 총서기를 맞았다. 이 자리에서 카스트로 총서기가 무장 혁명을 하면서 식량과 옷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냐고 물었다. 열대지방이라서 먹을 게 풍부했던 쿠바와 달리 만주 지역은 한해의 반이 동토가 되는 열악한 환경이다. 김일성 주석이 당시 극도로 열악했던 환경을 고생 끝에 이겨낸 사연들을 소개하자 카스트로 총서기는 탄복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김상일, 「김일성과 체 게바라, 혁명은 진정성은?」, 통일뉴스, 2008.3.10.)

 

오늘날까지 미치는 영향, 평가

김일성 주석은 1986년 6월 20일 「쁠럭 불가담운동의 강화발전을 위하여」라는 연설에서 “쁠럭 불가담운동은 본질에 있어 반제자주화운동”이라며 비동맹운동 국가들은 미국 등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데서 일치한 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연설 내용은 같은 해 9월에 진행된 8차 비동맹정상회의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제삼세계에서 북한의 입지는 상당히 탄탄하다고 한다. 이런 북한의 대외관계 현실은 김일성 주석의 제삼세계 외교를 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돌아보면 2018년 무렵 북한은 역사적인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협력과 한반도의 ‘자주통일’을 국제무대에 호소하는 숨가쁜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리용호 외무상은 비동맹회의 참가 등을 위해 중앙아시아의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여러 국가를 분주히 오가며 각료급 인사들과 접촉, 한반도의 자주통일을 강조했다. 같은 시기에 김선경 북한 외무성 유럽 담당 국장은 유럽연합 본부와 접촉하기도 했다. (「유럽·러시아·비동맹까지…북한 전방위 외교전 펼쳐」, 연합뉴스TV, 2018.4.6.)

2010년대 말부터 미국의 패권이 눈에 띄게 저물고 있다. 최근 국제사회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탈미 독자화, 특정 진영에 얽매이지 않는 비동맹 노선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과거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에서 유행했던 비동맹운동의 영향이 점차 유럽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와 관련해 일찍이 김일성 주석이 주도했던 반제자주 비동맹운동이 국제사회의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예상해볼 수 있다. 전 세계로 번진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북한의 대면 외교는 잠시 줄어들었지만 국제사회 영향력은 오히려 커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을 향한 공세의 고삐를 더욱 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 최고 수준의 제재 속에서도 이례적인 경제성장을 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독특한 코로나19 방역 정책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미국 패권의 몰락이 더욱 가속화되고 더불어 국제사회에서 비동맹 물결이 확산한다면 북한이 수십 년 넘게 추구해 온 비동맹 노선의 면모나 정당성이 좀 더 제대로 파악될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