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6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흥남철수의 비밀
*한국전쟁을 두고 남북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본 자료와 내용은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며 NK투데이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북한군 총반격
맥아더 총사령관은 1950년 11월 23일 추수감사절까지 북한 전 지역을 점령하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목표를 수립한다.
이에 유엔군은 청진까지 점령했지만 한반도 이북 전 지역을 모두 장악하지는 못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자 맥아더는 다시 12월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크리스마스 공세’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총공세들이 북한군과 주민들의 총반격에 부딪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11월 2일 운산지구에서의 반격을 시작으로 11월 하순 북한군의 총반격이 시작되면서 11월 26일부터 유엔군은 북쪽 지역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1950년 12월 말 다시 북한군은 38선을 넘었고 1951년 1월초에는 37도선을 넘어 내려왔다.
북한은 2달도 안되어 38선 아래로 유엔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던 비결을 ‘특이한 전법’ 때문으로 본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독특한 전략’ 첫 번째는 바로 군인들과 주민들에 대한 정치사업을 강화한 것이었다.
현재 북한군은 다른 여느 나라 군대와 달리 군대 내에 ‘정치위원’이 존재한다.
정치국, 정치위원은 군인들의 정치적 의식을 높이기 위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체계는 바로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김일성 총사령관은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북한군의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기구들과 조선노동당 조직을 군대 내부에 꾸렸다.
조선인민군 문화훈련국을 총정치국으로 바꾸고 각 부대에 조선노동당 조직과 정치기관들을 마련했다.
이들은 군인들의 정치적 각성을 높이기 위한 교양사업을 강화했다.
그리고 조직성과 규율성을 높이면서 조선노동당원들이 선봉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번째 전략은 유격전이었다.
10월 11일 김일성 총사령관은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는 방송 연설을 통해 ‘조국의 한치의 땅도 피로써 지켜 싸우며 후방인민들은 전시생산을 위한 투쟁을 강화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전선에 대한 공급을 보장하며 부득이 후퇴하는 경우에는 모든 물자와 철도운수수단을 옮겨 한 대의 기관차, 한 대의 차량, 한 알의 쌀도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북한군은 유격전을 통해 유엔군의 작전에 지장을 초래해 유엔군의 ‘최종승리’를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김일성 총사령관의 방침에 따라 각 산맥에 숨어들어간 주력부대들은 주민들과의 긴밀한 협조로 유격투쟁을 벌였다.
유격전은 유엔군의 배후를 끊임없이 교란시켰다.
주력부대가 있는 지역에서는 조선노동당 지방 조직들이 주도하여 산 속으로 대피한 주민들과 함께 인민유격대를 꾸리고 유엔군을 대상으로 유격투쟁을 벌였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 소년들까지 결합한 소년유격대가 꾸려져 유엔군의 운송수단, 전투기자재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유격투쟁은 유엔군의 전진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훗날 퇴각하는 유엔군을 괴멸시키는 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 번째는 유엔군이 썼던 전략을 북한군이 역이용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이 급속도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후방이 비어있음을 활용한 전술이었다.
마찬가지로 유엔군도 초기 북한군처럼 북한 깊이 들어가면서 유엔군의 후방은 사실상 비어 있는 상태였고 이를 북한이 활용한 것이다.
유엔군은 심지어 서부(제8군단)과 동부(제10군단) 간에 연계가 취해지지 못하면서 지휘에서의 통일성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이 수립한 전략은 이런 유엔군의 취약점을 활용해 포위시켜 섬멸하는 것이었다.
유엔군이 있던 청진에 인민군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유엔군 후방인 황해도, 강원도, 평안남도 일대에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새로운 반공격 시기는 11월 하순이었다.
북한군은 청진까지 진격한 유엔군 전방부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시작한다.
동시에 유엔군 후방지역에 배치된 북한 정규군 주력부대들은 유격부대와 함께 후방지역 농촌, 도시를 재차지해갔다.
곡산, 이천, 강동, 삼등, 철원, 춘천 등 각종 지역 ‘해방’전투를 통해 유엔군을 쫒아내면서 38선 일대의 거의 모든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면서 평양-개선, 평양-신계, 양덕-원산 계선을 완전히 장악해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유엔군이 증원되는 것을 막았다.
앞뒤에 배치된 북한군 주력부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유엔군은 고립되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유엔군이 도처에 숨어들어있는 유격대들에게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고립된 유엔군은 생존을 위해 흥남항을 통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흥남철수’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한편, 중국에서 지원병들이 대거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도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빠르게 후퇴시키는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참전은 유엔군에 비해 역량이 적었던 북한군이 유엔군과 대등한 규모의 군인 수를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을까?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은 북한 지역 뿐 아니라 만주지역까지 폭격했다.
중국은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 명단을 제시하며 여러 차례 항의를 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애초에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참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중국의 우려대로 북한-유엔군 전쟁이 중국-유엔군 전쟁으로 확전될 조짐이 보이자 본토 위협을 받게 된 중국은 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대만 통일을 위한 최후공격을 미루고 ‘항미원조(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돕는다)’ 운동을 일으켜 의용군 형식으로 지원군을 북한에 보내게 된다.
당시 중국 의용군 27만은 4일분의 식량과 80발의 소총탄만 지급받은 뒤 트럭 한 대 없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 뒤 필요한 식량과 장비는 모두 북한 유격대와 주민들의 협력을 통해 현지조달받았다.
북한 유격대와 주민들은 중국군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장비 운반과 길안내를 도맡아 처리해주었다.
이에 중국군은 미군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극비리에 이동을 계속했다.
산악지대로 깊이 들어간 중국군은 북한군과 함께 미군의 후방에 깊숙이 침투해 조중련합사령부 지휘 아래 ‘기습과 포위’ 전법으로 순식간에 유엔군을 고립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