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4.

“믿어지지 않겠지만 북한에는 공산당이 없다. 미국 언론에서 이 지역을 언급할 때마다 ‘공산주의’라는 딱지를 붙여왔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발견하고는 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 안나 루이스 스트롱, “북한, 1947년 여름”



세계에 공산주의 국가도 없지만 공산당이 없는 나라도 흔치 않다.

그 중 한국과 북한 모두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는 공산당이 아닌 조선노동당이 있을 뿐이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로 알려져 있음에도 왜 공산당이 없는 것일까?

그 비밀은 조선노동당 창립과 합당에 있다.

북한은 2차례의 합당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조선노동당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 북한 국가 수립에 이어 조선노동당 창립·합당 과정을 살펴보도록 한다.

 

※ 참고자료

도홍렬, ‘북한 농촌사회의 변혁과정’, 국사관논총 27집
북한용어사전 – ‘조선인민혁명’군, 중앙일보통일문화연구소
북한정보포털 – ‘조선노동당’, 통일부
‘만주 항일무장투쟁 중국사에 포함 움직임, 남북 역사학계의 공동대응 절실’, 민족21, 2005.11.01
임영태, ‘북한의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개혁 ③ –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개혁’, 통일뉴스, 2000.12.30
이종석,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북조선로동당으로의 ‘합동’에 관한 연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기광서, ‘북로당의 창설 : 한반도 공산주의 권력의 중심 탄생’, 한국역사연구회
“<조선노동당 60년>①’건설’과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 연합뉴스, 2005.10.06
“북한의 10월은 ‘노동당의 달’…각종 黨 기념일 몰려”, 연합뉴스, 2013.10.08.

 


 

 

국가와 당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⑫ 

2. 조선노동당의 건설


 
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으로 시작된 조선노동당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공산당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수도 서울에서는 국내에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이 1928년 해산된 조선공산당 재건을 추진했다.

8월 15일 밤 서울 종로구 장안빌딩에서 리영, 정백 등 몇몇의 사회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선포한다. (장안파)

한편 이들과 다른 세력이었던 박헌영, 이승엽 등 사회주의자들은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화요파)

결국 해방 직후 수도 서울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들이 단결해서 조선공산당을 건설하지 못한 셈이다.

그리고 장안파, 화요파 모두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전국 공산주의자들을 집결시키는 전국대표자대회, 전국대의원대회 등을 소집하지 않았다.

결국 소수 몇 명이 모여서 ‘당중앙’을 승인한 꼴이 되고야 만 것이다.

이런 현황에서 한반도까지 분단되어 서울에서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남북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묶어세울 수 없었다.

이후에도 박헌영 계열은 전국대표자대회, 전국대의원대회 등을 소집하지 못했다.

이런 현황에서 북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의 독자적인 흐름이 형성되었다.

각 지방마다 지역 당 위원회가 꾸려지면서 10월에는 38선 이북 지역의 당 위원회들의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우선 평양에서는 8월 17일 현준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평남지구위원회를 출범되었다.

현준혁은 조국광복회와 연계를 맺고 평양과 평안남도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는 김재갑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평안북도위원회가 출범했다.

함경남도의 경우 8월 16일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된 송성관을 중심으로 ‘함경남도공산주의자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주녕하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홍원지부’가, 원산에서 리주하 중심으로 조선공산당함경남도지구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함경북도에서는 김채룡이 조선공산당함경북도위원회를, 황해도에서는 김덕영과 송봉욱이 조선공산당해주지구위원회를 건설했다.

조선인민혁명군 출신들도 평안북도에 최용건·김일·서철, 함경남도에 전창철·석산·이용호, 함경북도에 최현·오진우·허봉학·최충길, 황해도에 박성철·김경석·박용술, 강원도에 임춘추 등이 파견되어 지역 위원회 건설을 도왔다.

이렇게 각 지역마다 지역위원회들이 건설되어 가는 가운데 1945년 10월 10일 김일성 주석은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개최해서 전국의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집결시키게 된다.

이 대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분단의 특수한 현실을 인정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따로 건설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분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은 ‘정치노선확립 조직확대 강화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결정서는 현 단계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자본주의)민주주의혁명으로 보았으며 토지문제를 기본과업으로 설정하고 친일파를 제외한 국내 전체 ‘인민전선’의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당이 수행해야 할 과업으로 공장, 광산, 기업소, 농장 등 기층 생산단위에 당세포(말단조직)를 꾸리는 것과 각계각층에서의 당의 외곽대중단체를 결성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결정서에 따라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1945년 12월 이북지역 노동자들의 조직인 북조선직업동맹이 출범했고 북조선직업동맹은 1년 후 북한 전체 노동자 43만 명 중 38만 명을 포괄하게 된다.

1945년 11월 북조선 여성동맹이 출범해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청년들의 조직은 해방 직후 공산주의청년동맹이란 이름으로 출범했는데 김일성 주석의 제안에 따라 1946년 1월 17일 북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으로 확대되었다.

민청은 훗날 150만 명의 회원을 가진 가장 규모 있는 사회단체로, 당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단체가 되었다.

1946년 1월 31일에는 북조선농민동맹이 창설되어 100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1945년 11월 25일 평양문화인직업동맹, 1946년 4월 북조선인민교원직업동맹 등이 꾸려졌다.

이렇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대중단체들의 건설에 적극 지지·지원함으로써 대중들의 정치활동을 보장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당원확대사업을 활발히 벌이면서 10월 당시 몇 백 명 수준이었던 당원들이 2개월 만에 4,530명으로 늘어난다.

이들 중 30%는 노동자, 34% 농민, 36%는 지식인·상인 등으로 당 내 다양한 계급계층이 망라되어 있었다.

공산당 당원들은 당세포 활동을 통해 대중단체를 비롯해 공장, 농장 등의 생산활동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당 지도부는 누가 이끌었을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건설되면서 처음에는 제1비서에 김용범, 제2비서에 오기섭 등이 자리를 맡으면서 주로 국내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들이 당을 주도했다.

그러나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민환영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이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인지도는 급속히 상승하게 된다.

그리하여 12월 17~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북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한편 남북의 다른 상황에 따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점점 서울 중앙과의 형식적 소속관계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자성을 갖고 한반도 이북지역에서 활동해나갔다.

1946년 5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북조선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