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1.

북한에서는 언제부터 연차유급휴가가 도입되었을까? ①
–  노동자들과 사무원을 위한 노동법령 제정과 그 의미 –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요구는 오랫동안 세계 수억, 수십억 노동자들의 바램이었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본격화되자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도구’가 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해왔다.

19세기 당시 영국에는 하루 12시간~13시간씩 노동을 하며 착취구조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수백 만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E.P.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상), 창작과비평사, 2000, 454쪽.

 

여성들은 임신 마지막 주까지 노동을 해야 했으며 일자리를 잃을까봐 출산 후 3주 혹은 그 전에 공장에 되돌아와 우는 아이에게 아편을 먹이면서 일을 했다.

당연히 열 살 미만의 아동들도 ‘노동’을 했다.

 

“겨우 걸을 수 있는 네 살박이 어린것들이…그들의 머리가 멍해지고, 눈은 충혈되어 쓰리고, 약한 애들은 허리가 굽어 기형아가 될 정도로 그 작은 손가락으로 소모기에 철사를 끼워넣는 단순작업을 수시간 계속하였다.”  

– E.P.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상), 464쪽. (창작과비평사, 2000)
  

노동자들의 건강도 좋을 리 없었다.
  

 

1818~1827년 리즈의 한 모직물 공장에서 사망한 성인과 미성년 노동자 92명 중 52명이 폐병 또는 ‘쇠약’으로 사망했을 정도였으며 1842년 리버풀 노동자 평균사망연령은 15세였다.

– E.P.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상), 451쪽, 458쪽.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저는 3세 때 어버님을 여의고..제 나이 17세 되는 봄.. 연초회사 여직공이 됐습니다.

임금은 30여전으로 감독이나 순사의 비위를 거스르면 겨우 20전에 불과하답니다…

퇴사할 시에는 경찰에서 죄인 다루듯 일일이 검사합니다.

그 무지한 감독 손에 유방에서 하부에 이르기까지 조사를 당합니다.

얼마나 원통합니까..뜨거운 물에 열 손가락이 짓물러서 보기에도 숭하거니와 손을 붙잡고 울 때가 많습니다.” 

– 동아일보. 1929. 11. 3. 이성광, “민중의 역사”, 197쪽. (기획출판 한)

 



정미소나 고무공장에서 애기 딸린 어머니들의 노동이란 너무나 비참하였다.

고무찌는 냄새와 더운 김이 훅훅 끼치는 공장 속에서 얘기에게 젖을 빨리며 쇠로 만든 롤러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정미소에 들가루가 뽀얗게 날리는 데서 갓 까논 병아리같이 마른 자식을 굴리는 것을 볼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들이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장에 나오는 것이라면, 이 가난의 책임을 그 얘기에까지 지우는 일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비위생적인 공기 속에서 병이 들고 약은커녕 먹지도 못하다가 죽어버리는 이 저주받을 운명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 ‘어느 부인기자의 일기,, “신가정”, 1935.2. 이성광, “민중의 역사”, 197쪽. (기획출판 한) 

 

 

일본 등 해외로 강제징용당한 노동자의 삶은 그야말로 ‘노예’였다.

 

 

강제징용노동자들의 모습



“전쟁 직후 우리 절에는 150구 이상의 한국인 광부의 유골이 있었습니다.

모두 탄광에서의 희생자입니다…

장례식이나 사고가 났을 때마다 노무계가 불러서 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글쎄, 차마 못볼 정도로 말라빠진데다가, 영양실조로 배만이 불룩하게 커져 있는 거에요.

‘조선인 놈들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일을 안해. 잠시만 내버려 두면 농땡이를 부리니깐…조선인 한두 명쯤 때려 죽여도 괜찮아.’

이런 소리를 노무계는 거침없이 내뱉곤 했더랬어요.”

 – 계천정관광사 주지 나카무라의 증언. 이성광, “민중의 역사”, 197쪽. (기획출판 한) 

 

당시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제국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식민지 36년 동안 조선 노동자들의 처지는 1~2세기 전 영국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1) 노동자들, 조직부터 꾸리다.

 

 

억눌러 살던 우리 노동자들은 1945년 8월 벅찬 마음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못살게 굴던 일본군과 경찰들, 일본 자본가들이 쫒겨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스스로의 권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각 곳에서 노동조합, 공장접수위원회 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위해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1945년 11월 5~6일에는 전국 노동조합 대표들은 서울에 모였다.

전국적 단일 조직,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을 꾸리기 위해서였다.

-찰스 암스트롱 지음, 김연철·이정우 옮김, “북조선탄생”, 서해문집, 2006년, 147쪽.

 

그리고 3개월이 지난 1946년 2월에는 전평이 무려 57만 4,475명의 노동자들을 포괄하게 되면서 전체 노동자 수의 7~80%를 아우르게 된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72쪽.

 

몇 개월 만에 이 같은 조직력에 도달한 것은 세계노동운동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새 나라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뜨거웠던 것이다.

전평 노동자들의 25%는 여성이었다.

봉건제의 굴레 속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은 남성 못지않았다.

전평은 8시간 노동제, 노동자들의 공장 운영 참가, 아동노동 금지 등 노동자들의 고유한 권리와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폭발된 요구는 온전히 현실로 꽃피우지 못했다.

분단 때문이었다.

미국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에서 38선 이북 지역은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등 자치조직들이 소련군에게 ‘일종의 정부기구’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남에서는 조선인들이 꾸린 자치단체들은 모두 불법이 되고 공장·기업소는 미군정의 소유로 되었다.

남북 상황이 첨예하게 달라지자 서울에서 결성된 전평은 남북 노동자들을 모두 포괄해 활동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전평은 38선 이남 노동자들의 실정에 맞게 활동하게 되었고 이북 지역 노동조합들은 ‘전평 북조선분국’이란 이름으로 따로 모이게 되었다.

전평 북조선분국은 산업노동자뿐 아니라 수공업자, 사무원 등 농민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직업군의 사람들을 묶기로 결정했다.

이런 실정에 따라 전평 북조선분국은 1946년 5월 25일 ‘북조선 직업총동맹'(직맹)으로 이름을 변경하게 된다.

기술자, 사무원까지 광범위하게 포괄하다 보니 ‘노동조합’ 보다는 ‘직업동맹’이란 이름이 더 자연스러웠던 것이었다.

직맹은 북한 노동자들의 각종 요구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나갔다.

그러면서 직맹은 1년 후 이북 전체 노동자 43만 명 중 38만 명, 즉, 88%를 포괄할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다.

남북 모두 노동자들의 조직이 이처럼 빠르게 성장한 것은 그만큼 해방조국의 주인으로 살겠다는 노동자들의 의지가 높았음을 방증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