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1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할매, 할배들이 우리 말을 읽는 순간. ⑤
국민의 몇 퍼센트가 글을 읽을 수 있는가는 한 국가의 문명화 지표이다.
지난 2013년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으로 7억 7,400만 명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고 있다는 통계치를 발표한 바 있다.
영국 BBC 역시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1,600만 명, 즉 성인 인구의 약 8%가 문맹이라는 보도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http://mn.kbs.co.kr/news/view.do?ncd=3580414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2012년 10월 8일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더 월드 팩트북(THE WORLD FACTBOOK)’에 따르면 북한의 ‘문자해독률(Literacy : 15세 이상 인구 중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1991년 기준으로 99%(남성 99%, 여성 99%)였다.
현재 한국에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형편 탓에 한글을 배우지 못한 노인들이 수십 만 명 존재한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상당히 놀라운 통계자료라고 볼 수 있다. (연합뉴스, “북한 문맹률이 0%에 가까운 까닭은”, 2012/10/08, “2008년 국립국어원의 ‘국민 기초 문해력’ 조사 결과, 문장 이해능력이 거의 없는 19세 이상 한국인 인구가 전체의 7%인 약 26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2000년대 남한에 정착한 한 탈북자는 “북한에 있을 때 글을 못 읽거나 못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 중에서도 문맹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해방 후 4년 만에 문자해독률은 99%에 달했다고 한다.
즉, 1949년 38선 이북지역 성인들 모두가 우리말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일본말을 썼던 일제 강점기 후 4년 만에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번 글에서는 북한의 문맹퇴치사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다.
아울러 해방 후 북한에서 진행된 교육사업 전반도 함께 다뤄보고자 한다.
할매, 할배들이 우리 말을 읽는 순간.
– 해방 후 북한의 교육사업 –
<목차>
1. 문맹퇴치사업
1) 중요성
2) 국가적 차원으로 진행된 문맹퇴치사업
3) 대중이 스스로 나서게 한 문맹퇴치 사업
2.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교육사업
1) 교원 마련
2) 기숙사·장학금·월사금 지원
3) 교과서, 학용품 지원
3. 대학교육
4.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
이렇게 하여 출범한 김일성종합대학은 7개 학부 24개 학과 중 문학부, 법학부를 제외하고 모두 이공계였다.
그만큼 이북지역 경제, 과학기술 발전에 인재가 절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설립 1년 후 농학부, 공학부, 운수공학부, 의학부, 물리수학부, 화학부, 역사문학부, 경제법학부 등 8개 학부, 19개 학과로 확대되었다.
1948년에는 야간대학도 신설해 직장이 있는 노동자, 그리고 농민들의 입학도 보장했다.
1948년 7월 7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조선 고등교육사업 개선에 관한 결정”을 통해 김일성종합대학의 농학부, 공학부, 의학부를 각각 따로 분리시켜 사리원농업대학, 평양공업대학, 평양의과대학을 세웠다.
이 밖에도 지역마다 특성에 맞게 대학을 건립했는데, 1948년 9월 1일 북한 지역의 대학 수는 총 11개교에 학생수 8,731명에 이르렀다.
대학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바로 아동청소년 교육사업을 위한 사범대학이었다.
이외에도 의학대학, 농업대학, 공업대학 등을 신설하여 이북지역 의학, 공업, 농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들을 육성했다.
4.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
그밖에 북한이 주목했던 교육사업은 바로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사업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생을 마감한 수많은 애국자들의 자녀들은 주로 만주지역에서 고아가 되어 떠돌아다니며 살거나 친척집에 얹혀 생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바 있는 김일성 위원장은 ‘희생당한 동지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동지들의 유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한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우선 김일성 위원장은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자녀들을 찾아내기 위해 림춘추, 박영순 등 독립운동가 대표단을 수차례 만주지역으로 보내 ‘동지들의 유자녀’를 찾도록 임무를 주었다.
“전화 속에 흩어져 행처도 생사여부도 알 수 없이 된 전우들의 유가족과 유자녀들을 찾아 우리가 잘 돌보고 잘 키워줘야겠소. 희생된 동지들은 조국이 해방되면 자기들의 어린 자식들을 공부시켜 혁명가로 키워달라고 하였고. 나는 어려운 싸움의 나날 어느 한 순간에도 그들의 유언을 잊어본 적이 없소. 유가족과 유자녀들을 남김없이 찾아 잘 돌보고 공부를 잘 시켜서 그들이 희생된 혁명선열들의 뜻을 이어 어엿한 혁명가로 자라도록 합시다.”
– 홍정자, “내가 만난 사람들”, 176쪽.
김일성 위원장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가했었던 김정숙 부인도 대표단에게 “결코 한두 번 찾다가 없다고 되돌아서지 말고 한 달이 지나도 좋고 두 달이 지나도 좋으니 이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기어이 찾아 데리고 오셔야 합니다.”라고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대표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모인 독립운동가 자녀들은 모두 320여명이었다.
김일성 위원장은 이들을 위한 기숙학교, 즉 학원을 건설할 것을 결심했고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7년 3월 혁명자유가족학원의 설립을 결정하게 된다.
학원 위치는 김일성 위원장의 고향인 만경대였다.
1947년 9월 건물 착공식을 가졌지만 바로 10월 13일 임시 교사를 구해 대동군 재경리면에 평양혁명자유가족학원 이름으로 학원 문을 열었다.
빠른 교육사업을 위해 건물이 건설되기도 전에 학교를 연 것이었다.
학생들이 임시교사에서 생활하고 수업을 듣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 독립운동가 출신들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학원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김정숙 부인은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던 아이들을 집에서 먹이고 목욕시켜 20~30일씩 데리고 있다가 학원으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첫발을 뗀 혁명가유자녀사업은 아이들에게 항일의식, 자주의식을 함양시켜 부모님의 활동과 업적을 계승해나가는 ‘일꾼’으로 자랄 수 있도록 했다.
평양혁명자유가족학원의 이종익 초대 원장은 임시정부 교육부장을 지니고 안중근 열사 이토 히로부미를 쏠 때 함께 했던 인물이었다.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이북을 방문한 김구 선생은 학원 원장이 임시정부 출신이라는 점, 학원에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반공주의자 양세봉의 자녀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놀랐다고 한다.
평양혁명자유가족학원은 훗날 만경대혁명자유가족학원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만경대혁명학원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이후 북한은 만경대혁명학원 뿐 아니라 강반석혁명학원, 남포혁명학원, 새날혁명학원, 해주혁명학원 등 지역마다 혁명학원을 건설해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웅이나 애국자’들의 유자녀 사업을 계속해왔다.
이후 북한을 이끌었던 지도부 중 많은 수가 혁명학원 출신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내각 부총리를 지닌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던 오극렬, 인민무력부장 출신 김영춘, 총참모장 출신 리영호 등이 있다.
(문맹퇴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