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2월 25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해방 이후 북한에서 친일파를 어떻게 청산했는가? ④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천왕폐화께 한가지 바치옵는
정성이련만 총을 잡는 어깨는
보람이 차는 것을.”
– 주요한(마쓰무라 고이치), <불놀이> 등의 작품으로 교과서에 기재된 시인. 훗날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역임.
-이성광, “민중의 역사1”, 기획출판 한, 228쪽
해방 후 우리 민족의 염원은 친일 청산이었다.
친일 청산은 단순히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심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조선사회에 만연했던 일제 잔재 전반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친일 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북한에서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것 정도는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시행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북한에서 친일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친일파 청산 과정과 사회문화적 일제 잔재 청산 두 부분으로 확인해보도록 하자.
[목차]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1. 해방, 그리고.
2.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출범
3. 중앙기구 차원에서 진행된 친일청산
1) 재판소 사법절차에 따른 처벌
2) 정치적, 경제적 조치
① 토지개혁 ② 친일재산의 국유화와 노동자 자주관리 ③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④ 그 외
4.친일파규정
1)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2) 정준택, 이활, 그리고 이광수
5.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6. 일제유산 청산
7. 북한 친일청산의 특징
1)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던 친일파 청산
2) 친일파 청산만큼 중요하게 바라봤던 일제유산 척결운동
3) 대중이 주인되었던 일제 잔재 청산
8. 친일청산의 결과
6. 일제유산 청산
우리들은 함흥에 도착하기 바로 전, 도민들을 위하여 신문을 발행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인쇄소에는 조선 문자의 활자가 없었다. 일본인들이 이미 10년 전에 그것을 없애버렸다. 학교에서 조선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조선말로 된 책이 없고 조선인 교사도 부족하다. 전부가 침략당하고 온갖 것이 일본화한 것이다. 책방은 일본인 덕망가의 생활을 취재한 교훈소설로 홍수가 났다. 조선의 유명한 옛 문인들의 저서를 찾아내려 별 애를 다 썼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2쪽.
해방 후 38선 이북지역에 주둔한 어느 소련군 병사의 수기다.
36년간의 일제 유산이 뿌리깊었던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 모든 일제 유산을 바로 청산할 수 없었다.
법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법률이 대중의 의사를 모아 정립되기 전까지 일제 강점기 법률을 상당기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은 1946년 11월 건국산업과 민족정서, 각종 조례에 상반되지 않는 법령에 대해 새 법령이 발표되기 전에 일제시기의 것을 유지하겠다는 포고를 내리기도 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3쪽.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일제 유산 청산 운동은 대중이 주인되어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자료들에는 그러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인이 쓴 한 수기에 따르면 일본인 피난민들은 해방 직후 조선인 가옥의 문패가 모두 한글로 바뀐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식 옷인 몸빼를 입거나 일본군인 전투모를 착용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봉변을 당하거나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식 어법과 용어사용도 자제되었다.
한 여성의 자서전에는 1945년 9월 초 해방 후 감격적인 첫 개교식을 맞은 평양 서문고녀에서 교사들이 바로 우리말로 수업을 해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평양방송국의 일본어방송도 1945년 8월 27일부터 바로 중단되었고 8월 29일 관서인민신문으로 개명된 평양매일신보도 한글로 발간했다.
일제 시기 배포되어 학교도서실이나 공공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던 일문서적은 완전히 폐기처분되었다고 한다.
1949년 1월 14일 내각 서적출판지도국은 '일본서적 및 출판물 단속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여 사전류를 제외한 모든 일문 서적 및 출판물의 판매를 금지했다.
이렇게 물질·문화적 잔재들이 서서히 일소해간 것이다.
사실 이것보다 더 중대한 과제는 바로 일제 시기 개인이 체득한 생활습성과 의식관념을 어떻게 청산할 지에 대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일제로부터 배운 뇌물상납, 횡령 등 습관들의 경우 대표적으로 청산되어야 할 관습이었다.
이런 관습이 해방 후까지 이어지는 것은 건국사업에 대단히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청산되어야 했다.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일제 문화, 관습 등을 척결하기 위한 운동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7. 북한 친일청산의 특징
이 부분은 김재웅씨의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논문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였음.
1)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던 친일파 청산
북한은 프랑스와 같이 친일 경력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재판에 넘긴다거나 처벌을 한다는 식으로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았다.
불과 4여년동안 독일의 통치를 받아야 했던 프랑스는 부역자 16만명이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았고 약 25%는 불명예 조치 및 공민권 박탈을, 나머지 24%는 유무기 징역 및 금고형, 7천여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36년간이나 식민통치를 겪은 조선이 부역자를 철저하게 숙청하게 될 경우 조선 전역에 피바람이 몰아칠 가능성이 컸다.
이는 새 조국 건설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제 시기 당시 각종 일제에 협력한 인물이여도 자기 반성을 하면 건국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고 훗날 건국공적을 인정해주었다.
불가피하게 생계를 위해 일제에 복무했던 지식인 계층에 대해 특히 관대했다.
새조국 건설에 전문인재들이 절박했던 북조선중앙임시인민위원회는 어느 정도 부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건국사업에 적극 나서겠다는 다짐을 하면 용서하고 전문 역할을 주었다.
심지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제가 남겨놓은 방대한 공업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일본인 기술자들까지 포용하기도 했다.
"인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본래 기술적 사명을 온전히 하기 위해 민주주의 조선의 기초를 만드는 공업화 사업에 적극 참가 협력"하겠다는 선언을 밝힌 '북조선 공업기술총연맹 일본인부'는 38선 이북 지역에서 당당히 신분증명서를 받고 북한 경제건설에 이바지했다.
그 수는 868명(가족 2,095명, 1946년 11월 당시)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이들을 위해 각지에 일본인 인민학교를 세웠고 최고급 수준의 월급, 생필품, 주택을 제공해주기까지 했다.
북한이 친일청산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외세에 자발적으로 부역한 그 누구도 다시는 민족을 착취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친일파의 토지 등 재산을 몰수하고 건국 직후의 선거에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박탈한 조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2) 친일파 척결만큼 중요하게 바라봤던 일제유산 척결운동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 청산만큼 물질적, 제도적, 문화적, 사상적 측면에서의 일제 유산 척결도 중요하게 바라봤다.
일제가 남긴 모든 유산과 세계관을 부정하는 기반에서 새 국가가 건설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식민통치 기간에 체득한 생활습성, 의식관념까지 모두 척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말보다 일본말을 더 많이 써야 했던 대중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문맹률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 대중교육에 큰 힘을 쏟았다.
그러한 '정신영역에서의 투쟁'이야말로 북한이 추구한 일제유산 척결운동의 완결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대중이 주인되었던 일제 잔재 청산
김일성 주석과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주도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친일청산은 오히려 대중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수십년간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세력의 입장에서는 친일파를 당장 심판하고 싶었겠지만, 전체 대중이 주인되어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봤다.
따라서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많은 친일청산사업이 지방조직인 인민위원회, 농촌위원회, 노동자위원회 등에서 자체적으로 판단되고 집행되었다.
중요산업국유화도 마찬가지였는데, 다음은 『조선전사』(1981)의 한 기록이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 23 (현대편 민주건설사 1)",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85쪽.
류석춘, 김광동, "북한 친일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격월간 시대정신, 2013년 봄호.에서 재인용
"남신의주 동양상공회사에 예속되었던 300여명의 노동자들은 성토모임을 열고 이 공장의 경영주였던 리 아무개의 형제를 친일파, 예속자본가로 규정하는 리유서를 만들고 그 놈의 소유를 몰수하였다. 함경남도에서는 악독한 친일주구이며 예속자본가였던 방아무개란 놈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그 놈의 재산을 철저히 몰수하였다"
이처럼 친일청산은 대중이 주인되어 스스로의 자치능력으로 진행한 과정이었다.
그렇다보니 1여년 안에 큰 소요 없이 일본인, 친일파들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청산을 이룰 수 있었다.
8. 친일청산의 결과
38선 이북 지역의 친일청산 결과는 훗날 독립운동가들이 북한 사회를 주도해나가는데 기여했다.
우선 북한 사회를 '영도'하는 조선노동당의 경우 그 출발부터 독립운동가들이 책임적 역할을 맡았다.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에 참여한 대표 801명 중 일제 시기 반일투쟁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이 373명(46%)이었고 그 중 옥중 생활을 한 사람이 263명, 이들이 받은 총형량은 1,087년이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14쪽.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경우에도 위원장 김일성(조선인민혁명군 대장), 부위원장 김두봉(조선독립동맹 주석) 김책(동북항일연군 제3군 정치부 부주임), 보안국장 최용건(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제2령 정치참모), 사법국장 최용달(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참여), 선전부장 오기섭(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등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주도했다.
특히 군대와 보안국(경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그 책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만주지방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했던 인물들의 진출현황만 보더라도 다음과 같았다.
최용건 :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사령관(1946.8)
김책 : 평양학원 원장(1946.2)
강건 : 나남훈련소 제2소(제2사단) 소장(1946.11)
안길 :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참모장(1946.8)
김일 :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문화부사령관(1946.8)
박성철 :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 군사부교장(1946.10)
오백룡 : 철도여단 부여단장(1946.10)
박영순 :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통신부장(1946.8)
허봉학 : 보안국 강원도 보안부부장(1946.7)
김창봉, 전문섭, 전문욱, 안영, 박우섭 : 철도경비대 간부(1946)
이외 김광협, 최용진, 최광, 최현, 김경석, 석산, 오진우, 이영호, 유경수, 최춘국, 심태산, 전창철, 조정철, 이두찬, 서철, 손종준 등이 조선인민군 및 내무성 군관으로 활동.
-이종석, "조선인민군 연구", 역사비평사, 197쪽.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16쪽.에서 재인용)
이외 문학예술 분야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작가, 예술인들이 주도했다.
1946년 10월 결성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반일문학예술운동을 벌렸던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출신들이 주도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40쪽, 146쪽.
'고향'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기영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카프의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안막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카프출신 한설야는 내각 교육문화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역임하며 북한 문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었다.
카프 출신의 예술가들은 향후 북한사회에서 애국주의, 미래에 대한 낙관 등이 담은 문학작품들을 창조하고 민족적 형식을 담은 민속무용, 민요 등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북한 예술공연에 민족적 형식이 강하게 담겨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