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18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중공업 우선 발전노선 ③ 사회주의 공업국으로 발돋움한 북한
1956년 12월 북한은 ‘자립적 민족경제’를 경제 노선으로 못 박았다.
자립적 민족경제란 자기 땅에서 나는 ‘원료’와 자체의 ‘노동력’과 ‘기술’을 이용해 발전하려는 방식이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북한은 경제 발전을 자체의 힘으로 해야지 사회주의 나라라고 해서 다른 나라에 의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갖게 된 듯하다.
실제로도 사회주의 나라들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총 12억 5천만 달러가 넘는 유·무상 원조를 보내주었으나 1957년 들어 소련은 1억 7천만 루블(현재 기준 2백 6십만 달러), 중국은 1억 5백만 달러를 원조했을 뿐이다.
그마저 1960년대에는 거의 완전히 중단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어려운 여건이 만들어진 셈이다.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을 선언한 북한은 어려운 여건을 딛고 자기 힘으로 ‘사회주의 공업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업국이란 일반적으로 공업이 생산량과 취업 인구에서 농어업을 뛰어넘으며 국가 경제의 중심이 된 나라를 뜻한다.
한국의 산업화 발전 과정을 보면 1963년에 농림수산업의 비중이 63.1%, 광공업의 비중이 8.7%였다.
1979년에는 농림수산업 비중은 35.8%로 하락했고 2차산업은 23.7%로 늘어났다.
중화학공업은 1963년의 29.7%에서 1979년의 54.8%로 비중을 높여 산업화를 이루었다.
북한은 1956년 전후복구를 마치고 1957년부터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축성하기 위한 1차 5개년 계획에 들어간다.
5개년 계획은 당초 1962년까지 이뤄져야 했지만, 북한은 2년 반을 앞당겨 1960년에 1차 5개년 계획 목표를 달성한다.
북한은 이어 1961년부터는 ‘전면적 사회주의 공업화’를 이루기 위한 제1차 7개년 계획을 수행한다.
이 계획은 계획보다 3년이 지체되어 1970년에 완료되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의 분쟁이 심화되어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적절한 연계를 이룰 수 없었고, 쿠바사태, 베트남전쟁, 푸에블로호 사건 등 대립과 분쟁이 격화된 탓이다.
북한은 경제 발전과 더불어 국방건설을 다그쳐야 했고, 1962년에는 경제-국방 병진노선을 선택해야 했다.
가중되는 난관과 국방건설이라는 중첩된 과제 속에서 북한은 1차 5개년 계획과 1차 7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 공·농업 총생산액 및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공업과 농업의 비중(%)
● 제1차 5개년계획의 실행성과(1956년 = 100)
사회주의 공업국으로 발전하기 위한 북한의 노력은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 50년사 저자 임영태는 “60년 북한 사회는 과히 산업혁명기라 할 만큼 공업화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1970년에는 1956년에 비해 공업생산액이 11.6배로 성장했다.
공업생산액 중 생산수단 생산(중공업)은 1956년의 11.3배, 소비재 생산(경공업)은 9.3배로 성장했다.
북한은 1969년에 총생산 중 중공업 생산 비율 65%를 달성하였다.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은 7개년 계획을 마치는 해인 1970년, 제5차 당대회를 열어 “계획기간이 3년이나 연장되는 등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공업화의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고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는 등 전체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크게 진전시켰다”고 평가하며 ‘사회주의 공업국’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북한이 한국전쟁으로 피폐했던 상황을 딛고 대내외적 악조건과 종파사건을 겪으면서도 빠르게 공업국가로 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