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4.

현재 북한의 공식 국가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1948년 9월 9일에 수립되었다.

그리고 현재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도’하고 있다.

영도라 함은 ‘앞장서서 지도하고 이끎’을 뜻한다. (다음(Daum) 한국어 사전)

그렇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노동당이 세워진 과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어떻게 정당이 국가 전반을 이끌게 되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0. 북한은 선거를 할까? – 북한의 선거, 정치시스템”에서 당의 국가 영도 시스템을 다룰 예정이다.

 



국가와 당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⑩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과정 

 

(계속)



④ 조선최고인민회의

 

남북 모두 ‘대표가 선출’되면서 제2차 남북 연석회의의 결정사항이었던 “조선최고인민회의”가 개최되었다.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는 9월 2일에 열려 10일까지 진행되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의장단을 선출하고 대의원 자격을 심의했다.

선출된 의장단은 남측 인물이 많았다.

의장에 남조선노동당 출신의 허헌, 부의장에 남조선노동당의 이영과 천도교청우당의 김달현이 선출된 것이다.

대의원은 남성이 87.9%, 여성이 12.1%였다.

그리고 농민이 34%로 가장 많았고 종교인, 기업가, 상인, 수공업자, 과거 지주도 있었다.

 


⑤ 조선중앙정부 수립

 


다음으로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제2차 남북 연석회의 결정사항이었던 “남북조선 대표자들로 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한다”를 집행했다.

헌법, 정부(내각)구성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최고인민회의 주요 지위를 남쪽 인물들이 많이 맡은 상황에서 내각은 북쪽 인물들이 많이 맡았다.

김일성 위원장이 내각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박헌영(남), 홍명희(북), 김책(북)이 부수상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초대수상


이렇게 해서 꾸려진 내각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북), 민족보위상 최용건(북), 국가검열상 김원봉(남),
내무상 박일우(북), 외무상 박헌영(남), 산업상 김책(북),
농림상 박문규(남), 상업상 장시우(북), 교통상 주영하(북),
재정상 최창익(북), 교육상 백남운(남), 체신상 김정주(북),
사법상 리승엽(남), 문화선전상 허정숙(북), 노동상 허성택(남),
보건상 리병남(남), 도시경영상 리용(남), 무임소상 이극로(남)



남쪽 인물 8명, 북쪽 인물 9명이 오늘날로 따지면 장관직을 맡은 것이다.

 



김일성 내각 수상, 최용건 민족보위상, 김책 부수상 등.

 


⑥ 헌법 논의

 

그리고 헌법이 논의되었다.

헌법은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였다.

대의원들은 1948년 4월 28~29일 북조선 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초안에 바탕해 9월 2일부터 논의를 시작해 9월 8일 헌법을 채택했다.

심화논의는 헌법위원회를 따로 꾸려서 진행했는데 위원에는 제주 김달삼 대장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헌법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본 성격은 일제 잔재와 봉건 유제 타파,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구조를 규정한 것이었다.

몇 가지 주목할 점은 우선 공민의 기본적 권리·의무에 중소산업과 상업을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된 것이다.(제 19조)

즉, 1948년 초기 헌법은 ‘사회주의헌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산수단(땅, 공장 등)의 소유 형태로 개인 소유도 인정되었다.

토지소유가 개인에게 용인되었는데 토지개혁 당시와 마찬가지로 개인은 5정보까지 허용되었다.

학교나 병원 등의 단체는 20정보까지 소유할 수 있었다.

신앙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결사·집회·시위의 자유도 보장했다.(제13, 14조)

그리고 초등교육 의무제, 가난한 학생에 대한 무상교육, 전문학교 및 대학의 무상교육 내용을 담았다. (제17, 18조)

최고주권기관은 주민들의 직접선거로 구성되는 최고인민회의였다.

그리고 중앙의 실질 행정집행 기능은 최고인민회의에서 구성하는 내각에 맡겨졌다

 

⑦ 국내외 정부 수립 선포

 

1948년 9월 9일 10시 모란봉극장에서 김일성 수상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 앞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공식 선포한다.

이렇게 되어 북한의 창건절(정부수립일)이 9월 9일로 된 것이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한 각지에서는 경축행사가 이어졌다.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 지역에서 열린 군중대회에 500여 만 명이 참가해 정부 수립을 축하했다.

김일성 수상은 정부 수립과 함께 중점 사안을 담은 정부 정강을 발표했다.

 

첫째,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선결조건이 되는 미소 양국 군대의 철수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둘째, 조선 인민의 이익을 배반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적극 협력한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처벌한다.

셋째,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노동법, 남녀평등법 등 민주개혁을 더욱 공고화할 것이다.

넷째, 경제의 식민지 예속성을 청산하고 조선 인민의 복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자주적 민족경제를 건설할 것이다.

다섯째, 교육과 문화와 보건 분야의 발전을 위해 힘을 쓸 것이다.

여섯째, 인민정권기관(지방인민위원회)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일곱째, 여러 자유애호국가들과 친선관계를 맺고 노력할 것이다.

여덟째, 외래 침략 세력에서 국토를 보위하고 민주개혁의 성과를 보호하기 위해 인민군대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북한은 그해 10월 소련, 몽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차례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11월에는 헝가리, 불가리아, 알바니아와 수교했다.

이렇게 하여 대외적으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공식화되었다.

 

⑧ 점령군 철퇴 요청

 

최고인민회의는 ‘점령군 철퇴에 관하여 미·소 양 정부에 대한 조선최고인민회의의 요청문’을 발표했다.

 

“조선의 영토에는 지금도 미·소 양군이 주둔하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조선은 민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가분의 단일체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8선을 경계로 하여 둘로 분할되어 있다….. 조선 인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수개월간 미·소 양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리라는 것을 양해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이루어졌고 무조건 항복할 당시로부터 이미 3개월이 경과한 오늘날, 외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또 정당성도 없다….조선최고인민회의는 미국 정부도 조선 인민의 민족적 이익을 존중하고 제 국민 간의 안전과 평화와 친선의 강화를 기원하는 조선 인민의 요청에 의해 소련군이 한국에서 철퇴하는 것과 동시에 철퇴하도록 요청한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소련군은 1948년 12월 25일까지 이북 지역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정치적 부담을 느낀 미군 역시 1949년 6월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이남에서 철수하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