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 2021년 03월 09일
기사 제목 : [북한은 왜?] 통일되면 북한에서 내 조상의 땅을 찾아올 수 있을까? ①
토지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자원 중 하나이다.
따라서 토지를 누가, 어느 계급이 소유하느냐는 사회제도의 규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류는 태초에 ‘자연의 것’이었던 땅을 ‘사유화’하기 시작하면서 계급사회를 잉태했다.
인류 역사상 기록된 수많은 전쟁 역시 대부분 땅을 빼앗고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북한은 모든 토지가 공공 소유로 되어 있다.
북한 헌법 제 20조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제 21조 나라의 모든 자연부원, 철도, 항공운수, 체신기관과 중요공장, 기업소, 항만, 은행은 국가만이 소유한다”, “제 22조 토지, 농기계, 배, 중소공장, 기업소 같은 것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어 토지의 사적 소유를 용인하지 않고 있다.
특히 자연자원 중 산과 강은 국가만 소유하고 토지는 국가뿐 아니라 사회협동단체 소유가 가능하다고 명시한다.
북한은 추가로 제 22조에 “사회협동단체소유는 해당 단체에 들어있는 근로자들의 집단적 소유이다.”고 명시해두어 사회협동단체 소유권에 대한 해설도 뒀다.
북한에서의 사회협동단체는 한국의 협동조합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인다.
협동조합은 법적으로 조합원 전체가 회사의 소유권을 가진다.
북한의 사회협동단체 역시 단체원들이 그 재산을 집단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수천년동안 왕, 일본 총독부, 지주, 농민들의 사적 소유물이었던 땅을 어떻게 국가 혹은 협동조합 소유로 바꿀 수 있었을까?
이것은 1946년 시행된 토지개혁과 1950년대 후반에 완료된 협동농장화를 통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1946년 토지개혁으로 토지의 균등분배를 이뤄냈으며 1959년까지 전 토지를 협동농장 소유로 바꿔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땠을까?
이번 글에서는 1946년 시행된 토지개혁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은 왜?] 통일되면 북한에서 내 조상의 땅을 찾아올 수 있을까?
– 단 26일 만에 진행된 토지개혁
<목차>
1. 일제 강점기 당시 농민들의 처지
2. 토지개혁의 시작
3. 토지개혁의 구체적 실현
4. 토지개혁의 특징
5. 토지개혁의 결과
6. 통일 되면 북한에서 내 조상의 땅을 찾아올 수 있을까?
1. 일제 강점기 당시 농민들의 처지
역사가 생긴 이래 모든 경자(경작하는 자)가 자신의 땅을 가졌던(경자유전, 耕者有田) 시대는 없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지주-소작제는 농민의 삶을 끊임없이 위협했으며 착취는 일제 강점기 더욱 심해져 조선의 많은 농민들을 아사 직전까지 몰고 갔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후 가장 힘을 쏟았던 사업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조선인들을 땅으로부터 ‘배제’시켰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상)”, 김주환 옮김, 청사, 1986년, 95쪽.
토지소유권 조사에서 기본은 ‘신고’였다.
그러나 절차상의 번잡함, 총독부에 신고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반발감으로 많은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신고하지 않았고 땅을 그대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기고 말았다.
게다가 국유지를 경작하거나 공동소유화했던 농민들의 토지는 모두 총독부 관할지로 편입되어 일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헐값으로 매각되고 만다.
-서민교,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7쪽, 59쪽.
이로서 조선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의 지주가 된다.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경지의 10% 이상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서민교,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61쪽.
통계자료에 따르면 토지조사사업 후 4년이 지난 1922년 100정보(30만평)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한국인이 426명이었고 일본인이 49명이었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주환 옮김, 청사, 1986년, 95쪽.
토지조사사업은 기존의 지주들에게 배타적 소유권은 인정해 지주-소작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상)”, 김주환 옮김, 청사, 1986년, 96쪽.
1910년대 후반이 되자 전체 농가 호수의 3.1%(약 9만호)에 불과한 지주는 전 경지면적의 50.4%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소작이 불가피한 농가가 77.2%(200만호)에 달하게 된다.
3%에 불과한 지주가 전체 경작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극단적 불균등한 토지소유관계가 일제 강점기 형성된 것이다.
-서민교,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62쪽.
1930년 실시된 2개의 토지조사기록에 따르면 한국 농민들 중 소작농 비중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상)”, 김주환 옮김, 청사, 1986년, 96쪽.
해방 직전 땅을 전혀 가지지 못한 소작농의 비율은 70%에 달했다.
인구의 증가와 토지의 집중으로 많은 소작농이 출현하면서 지주는 쉽게 소작인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소작지의 상실은 소작농들에게 생존 그 자체의 위협이었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주환 옮김, 청사, 1986년, 97쪽.
전문가들이 모든 소작지의 20~40%에서 매년 소작인이 바뀌었다고 분석할 정도로 소작권의 이전율이 매우 높았다.
-이훈구, “조선의 토지이용과 농촌경제”에서는 모든 소작지의 20~40%에서 매년 소작인이 바뀌었다고 보고 있음.
Ladejinsky(울프 라데진스키), “Chosen’s Agriculture and Its Problems”, 미 농무성, 1940에서는 약 30%로 보고 있다.
그렇다보니 1930년 소작인과 지주와의 일반적 수확분배율은 거의 50:50에 가까웠으며 전라도, 경상도와 같이 토지가 비옥한 지역에서는 소작료가 90%에 이르기도 했다.
-이 아래 부분은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상)”, 김주환 옮김, 청사, 1986년, 98쪽에서 거의 인용.
소작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소작인들은 해가 갈수록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농민들은 춘궁기(봄)에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를 받았고 고리대금업자는 대부의 이자를 연 60~70%까지 요구했다.
소작인들은 ‘소작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무보수로 지주의 집안일 돕기, 새해선물 하기, 지주의 토지세까지 대신 내주기 등의 다른 부담을 감당해야 했다.
1930년대 한국 신문에는 ‘춘궁기’ 보릿고개 농민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배고픔에 지친 농민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덕원에서만 2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집안에 앉아서 죽음만 기다릴 수 없기에 2천이 넘는 사람들은 거리를 헤매고 있다. 비합리적인 한국 농촌경제체제는 이렇게까지 농민계급을 극악한 처지로 만들어 농촌은 황페화된 상태다.
천연재해가 농작물에게 큰 타격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초가을에 소작농민들은 그들이 지은 농산물을 거의 다 잔인한 지주와 파렴치한 고리대금업자에게 모두 빼앗겨 버렸다. 농민들은 식량의 부족으로 고통을 당해왔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절망적이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을 업고 마을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
-1932년 3월 27일자 조선일보에서 인용. 이훈구, “조선의 토지이용과 농촌경제”, 상해 : Kelly&Walsh, 1936, 171쪽.
일제 총독부 보고서에도 1938년 약 300만 농가, 즉 농업인구의 80%가 소작인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매년 봄에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산기슭에서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데 거의 절망적인 상태다.
이 보고서는 농민들의 ‘막대한 부채’ 역시 언급하고 있다.
몰락한 농민들은 소작농보다 화전(숲이나 농사짓기 어려운 땅에 불을 놓아 밭을 가꾸는 것)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계에 따르면 1930년에서 1932년까지 2년 사이에만도 화전농의 숫자가 3만 8천여명에서 6만명으로 증가했다.
-고바야가와 구로, “한국농업발달사” 부록 표1,3, 조선농회, 1944.
대부분의 조선 농민들에게 있어 삶이란 ‘직접 격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도의 빈곤’이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일제통치가 한국의 전통적인 지주계급을 강화시켰다. 식민지로서 모든 방면에 걸쳐 착취당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은 어느 나라보다 비참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상)”, 김주환 옮김, 청사, 1986년, 104쪽.
광복 후 미군정청의 노무부장을 지녔으며 제헌 국회의원까지 지닌 농촌경제학자 이훈구, 앤드류 그라단재프(Andrew Grajdanjef) 등 온건한 학자들조차 조선의 토지상황은 급진적인 변혁 없이는 절망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앤드류 그라단재프는 “모던 코리아”에서 “지주에게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고 경작하는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해야 하며 ‘기생하는 집단과 다름없는’ 지주들에 의한 ‘계급지배의 위험’을 예방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앤드류 그라단재프, “모던 코리아”, 태평양관계연구소, 1944년. 제10장.
(계속)